지난해 10월 미국 의회가 7천억달러 규모의 금융구제법을 통과시킬 당시 미 언론 매체들은 대공황 이후 최대 규모의 재정투입이 이뤄진다고 대서특필했다.
그러나 천문학적인 재정이 투입되고도 미국의 금융시장은 여전히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으며 대형 금융회사들의 일부는 산소호흡기에 의존해 연명하는 형편이다.
이로부터 4개월여 흐른 13일 미 의회는 금융구제법이 세웠던 종전기록을 능가하는 7천870억달러의 경기부양법안을 통과시켰다.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은 "미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경기부양책 가운데 하나"라고 표현했다.
이제 관심사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서명과 함께 7천870억달러 규모의 부양책이 시행되면 중병에 걸린 미국 경제가 살아날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7천870억달러는 미국 국내총생산(GDP)에 5%에 육박하는 규모로 결코 적지 않은 액수다.
이 정도의 재정자금이 투입되면 단기적으로는 상당한 효과가 나타날 것으로 예상되지만 장기적인 경기진작 효과를 발휘해 미국 경제를 침체에서 건져낼 수 있을 것인지는 현시점에서 단언하기는 어렵다.
이런 불확실성이 바로 민주당과 공화당이 경기부양법안의 통과를 둘러싸고 팽팽한 이념논쟁을 벌인 핵심 이슈다.
재정지출을 줄이고 감세를 대폭 확대할 것을 주장해온 공화당의 존 베이너 하원 원내대표는 "일자리 창출을 목적으로 하던 경기부양법안이 결국은 재정지출을 위한 것으로 바뀌어 버렸다"면서 법안 통과에 끝내 반대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공화당은 무분별한 재정지출로는 경기를 살리지 못하고 일부 기업과 이익집단의 잇속을 챙겨주면서 혈세만 낭비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사회인프라 구축사업에 돈을 투입하는 과정은 필연적으로 비효율성을 수반하게 되며, 일본의 경우처럼 이용자가 없는 쓸데없는 도로와 교량만 잔뜩 지어놓고 정부의 재정적자만 눈덩이처럼 키울 것이라는게 공화당의 반대논리였다.
이에 반해 민주당은 현시점에서 절박하게 필요한 것은 재정지출이라며 빈사상태에 있는 경제를 일으켜 세우기 위한 `점프 스타트' 기능을 하는 것은 감세가 아닌 재정지출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민주당은 감세의 효과를 전면 부인하지는 않지만 지금 당장은 즉각적인 효과를 낼 수 있는 방안에 주안점을 둬야 한다는 것이다.
오바마 대통령은 부양책이 "완벽하지는 않다"고 인정했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직장을 잃고 고통받는 미국민에게 당장 생계를 보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조치라고 강조했다.
상.하원의 절충과정에서 부양책의 3분의 1은 세금감면으로, 나머지는 일자리 창출을 위한 사회 인프라 건설을 비롯한 각종 재정지출로 배분됐다.
민주당의 입장에서는 재정지출이 줄어든데 대한 아쉬움이 있을테고, 공화당으로서는 감세 규모에 못마땅한 입장이다.
그러나 모든 부분을 재정지출로 채우건, 아니면 그 반대로 100% 감세로 충당하건, 미국 경제가 쉽게 회복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데는 이견이 없다.
지난해 4.4분기 미국의 저축률은 2.8%로 치솟았다. 최근 수년간 1% 미만에 그쳤던 것에 비하면 엄청나게 상승한 것이다.
흥청망청 빚을 얻어 소비하던 미국이 부채조정 과정에 진입하면서 저축률이 올라간 것으로 보인다.
앞으로 실업률이 얼마나 더 올라갈지 모르고 자신의 일자리도 크게 위협받는다는 불안감에 모두가 소비를 줄이고 유사시에 대비해 저축을 늘리는 행태는 소비경기를 더욱 위축시켜 침체의 악순환을 불러올 수 있다.
이번 부양책으로 미국민 95%가 1인당 400달러, 맞벌이 부부는 800달러의 감세혜택을 보게 된다. 이 정도의 돈으로 소비재를 구입하면 상당한 내수진작 효과를 낼 수 있다.
그러나 현재 미국의 대다수 소비자들은 감세로 생기는 돈을 빚을 갚거나 비상금으로 저축해둘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재정지출 역시 비슷한 문제를 안고 있다.
현재 미국의 경제위기의 근본원인은, 가계가 상환능력을 초과해 빚을 얻어 부동산을 구입했다가 갚지 못한데서 비롯됐다.
기업부문은 2000년대 초 닷컴 버블이 꺼지면서 어느 정도 긴축을 해왔지만 가계와 금융부문은 과도한 레버리지로 거품을 심하게 키운 후 일거에 꺼지면서 충격에 빠진 상태다.
기업구조조정은 타깃이 선명한 반면 가계의 부채조정은 훨씬 광범위하고 기간도 오래 걸린다. 7천870억달러의 부양책으로 가계부문의 거품붕괴 후유증을 한번에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민주당 의원들도 애초에는 부양책을 통해 350만개의 일자리 창출이 가능할 것이라고 외쳤으나, 이제는 일자리 창출이 아니라 당장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실업자 가정에 원조를 보내는 것이 더 시급한 문제라고 얘기할 정도로 미국의 경제 상태는 심각하다.
타이밍이 적절했는지도 추후 논란이 될 수 있다. 오바마 대통령이 취임 후 법안이 통과되기 까지 한달 가까운 기간에 미국의 경기지표는 계속 악화되고 실업자가 눈덩이처럼 늘었기 때문이다.
천문학적인 재정지출과 감세는 결국 연방정부의 적자를 키우고 장기적으로 재정의 건전성을 훼손하게 된다. 달러화의 가치도 흔들리게 마련이다.
오바마 정부는 이번 부양책이 멈춰 서버린 기관차가 움직이도록 불꽃을 일으키는 역할을 하면, 서서히 기관차가 움직이면서 자체 동력으로 궤도를 달리게 만드는 것을 학수고대하고 있다.
만일 이런 기대대로 미국 경제가 움직여주지 않는다면 더 심각한 재정적자를 감수하고서라도 추가로 부양책을 강구해야 하는 상황이 도래할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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