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정은 현대그룹 회장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의 공동합의문이 17일 발표됨에 따라 남북관계 향방이 주목되고 있다. 지금까지 악화일로를 치달았던 남북관계에 있어 대화의 물꼬를 틀 수 있을 것이라는 게 대체적인 시각이다. 전문가들은 북한이 남북경협에 의지를 표명한 만큼 우리 정부도 일방주의적 정책에서 탈피, 관계개선에 적극나서야 한다고 주문했다.
◆정부 "이번 합의는 민간차원"
정부는 이번 합의 소식에 신중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현 회장이 민간사업차 방북을 한 것이기 때문에 공동합의문도 민간차원에서 합의가 이뤄졌다는 것이다.
통일부는 17일 브리핑을 통해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면담계기로 발표한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와 현대그룹의 공동보도문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지만 이는 민간차원의 합의"라고 못박았다.
천해성 통일부 대변인은 “합의사항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남북 당국간 대화를 통한 구체적인 합의가 필요하다"며 "정부는 조속한 시일 내에 남북 당국간 합의가 이뤄질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노력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게다가 통행·체류 관련 제한 해제를 빼고는 대부분 내용들이 정부와의 협의없이 사업자끼리의 합의만으론 추진될 수 없는 것들이다. 이런 맥락에서 통일부 등은 이번 합의에 담긴 북한의 의도 분석에 주력하는 한편 향후 대응 기조를 신중하게 모색하고 있다.
공동보도문에 이산가족 상봉 등 남북 당국간 협의가 필요한 사업들이 대거 포함돼있지만 우리 정부에 대한 대화 제의가 없다는 점에서 정부 일각에서는 북한의 '전술적 의도'를 경계하는 시각도 나오고 있다.
북한이 이날 민간교류협력 사업을 총망라한 현대와의 합의를 발표하면서 한미간의 을지프리덤가디언(UFG) 군사연습에 강력 대응, '전군·전민·전국 특별경계태세'를 선포한 것은 아직 정치·군사적 긴장관계까지 동시에 풀 생각은 아니라는 해석이다.
◆남북대화의 물꼬 텄다
그럼에도 전문가들은 이번 계기로 남북관계의 숨통이 트였다는 평가다.
고일동 KDI 선임연구위원은 "남북대화에 있어 중요한 조건이 마련됐다고 볼 수 있다"며 "이를 통해 다른 현안들을 해결해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고유환 동국대 북한학과 교수도 "당국간의 분위기가 좋지 않은 가운데 민간차원의 합의를 이끌어냈다는 것은 의미가 크다"고 밝혔다.
합의내용의 성격상 정부의 비공식 메시지가 있지 않았겠느냐는 추측도 조심스럽게 제기되고 있다.
백학순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합의 내용이 민간기업 회장의 수준을 넘어선 것"이라며 "장관급 회담이랑 똑같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현 회장에게 전달한 이 대통령의 메시지가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백 수석연구위원은 "만약 정부가 어떤 메시지를 북측에 전달한 게 아니라면 북한에서 남북간 문제를 개선하기 위한 강력한 의지를 표명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 교수도 "이번 현 회장 방북으로 협력사업에 대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입장을 재확인할 수 있었다"며 "이명박 대통령의 8·15경축사 제의에 대한 긍정적인 응답으로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정부, 적극적인 행동 보여야
북한이 의지를 표명한 만큼 정부는 신뢰를 회복할 수 있는 적극적인 행동을 보여야 한다고 주문했다.
양 교수는 "이번 유씨 석방과 5가지의 방북 성과로 남북관계는 오랜만에 탄력을 받았다"며 "남북 모두 큰 틀의 정치를 통해 이번 탄력을 이어가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양 교수는 또 "북한은 북미관계 개선을 위한 노력을 보여야 할 것"이고 "우리 정부는 6·15와 10·4 선언을 뛰어넘는 또 하나의 성과를 내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백 수석연구위원은 “이제 대북문제는 남한에 공이 넘어온 것”이라며 “정부에서도 정책적 변화가 요구된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정부가 보여온 대북강경론이 일부 수정될 수밖에 없지 않겠냐는 추측이다.
반면 남북관계 개선여부를 좀더 지켜봐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고 교수는 "이번 합의가 당국간 합의로 이어지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며 "안보리 제재의 틀이 있는 한 민간의 합의가 본격화되기에는 힘든 부분이 있다"고 전했다.
그는 "북한의 비핵화와 관련된 정부의 제스처가 앞으로 당국간 분위기를 주도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아주경제= 이나연·팽재용 기자 ny@aj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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