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분기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이 2.9%에 달하는 등 국내 경제가 완연한 회복세로 접어들고 금융위기 재발 가능성도 잦아들면서 국내 금융시스템에 대한 개편 논의가 활발해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국내 금융시장을 은행 중심의 간접금융 방식에서 시장을 통한 직접금융 방식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은행 대출로 자금을 조달하는 방식에서 탈피해 채권, 증권 등으로 조달 채널을 다변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금융시장의 파이를 키우기 위해 국내 금융기관들이 적극적인 해외 진출을 추진해야 한다는 의견도 힘을 받고 있다.
◆ 금융의 중심…은행에서 시장으로
지난 수 십년 동안 국내 기업들에게 금융이란 은행 대출과 같은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대부분 은행을 통해 자금을 조달했기 때문에 채권, 증권 등의 직접금융시장은 상대적으로 위축될 수 밖에 없었다.
지난 6월 말 현재 예금취급기관의 총 대출 잔액은 1234조1330억원으로, 국내 유가증권시장(코스피)에 상장된 기업들의 시가총액 812조9933억원보다 51.8% 많다.
은행권 대출은 지난해 3분기 1180조9910억원, 지난해 4분기 1201조6194억원, 올 1분기 1217조364억원으로 가파른 증가세를 그리고 있다. 경기침체로 유동성 부족에 시달리는 와중에 자금을 조달할 수 있는 유일한 수급처가 은행 밖에 없었다는 반증이다.
반면 증시에 몰린 돈은 미미했다. 투자성 상품인 투자자예탁금은 4일 기준 12조4533억원, 환매조건부채권(RP)은 48조9194억원에 불과하다. 국내 주식형 펀드(76조7673억원), 채권형 펀드(45조6218억원), 머니마켓펀드(MMF, 78조6907억원) 등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국내 대표적인 기업 중 하나인 LG전자가 회사채 발행으로 유치한 자금은 1조8893억원(3월 말 현재)인데 반해 은행 채무는 2배 가량 많은 3조3638억원에 달한다.
국내 금융시장이 은행 중심의 간접금융 방식을 선호하는 것은 일본식 금융시스템을 그대로 승계했기 때문이다. 지난 반세기 동안 정부가 고도 성장을 이끌기 위해 은행을 통한 관치금융을 벌였던 것도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은행 대출에 목을 매는 자금조달 방식이 유지될 경우 민간 금융시장을 위축시키고 일부 시중은행과 금융공기업에만 수익이 편중될 수 있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진 후 은행권 대출이 얼어붙자 산업계 전 부문이 자금난에 허덕인 것은 국내 금융시장의 한계를 드러내는 부분이다.
전문가들은 국내 금융시장이 성숙해지기 위해서는 자금조달 채널을 다변화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조언한다.
오석태 SC제일은행 글로벌마켓 총괄본부장은 "장기적으로 봤을 때 국내 금융시장에서 비교적 후진적인 부채 관련 분야는 선진화하고 민간 금융시장을 육성할 필요가 있다"며 "은행들은 금융지주사 전환을 통해 대출을 줄이고 캐피탈 마켓에 직접 참여하는 방향으로 영업 방식을 개선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부도 입법 등을 통해 간접금융을 키우는 쪽으로 정책 방향을 선회하고 있다. 지난 2월부터 시행된 자본시장통합법은 금융 다양성을 확보하고 금융시스템을 선진화할 수 있는 중요한 촉매제가 될 수 있다.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달 개최된 국제자산운용협회 총회에서 "국내 외화건전성 지표, 레버리지(차입투자) 문제 등을 검토해 국가적인 차원에서 경제·금융시스템을 보완해 나갈 것"이라며 "자본시장을 키워야 금융산업이 균형적으로 발전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 금융기관, 국내 벗어나 세계로
우리나라는 다른 선진국보다 금융위기의 한파를 비교적 잘 극복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금융시스템과 투자상품이 미국 등 선진국에 비해 단순하고 파생상품 판매 비중이 높지 않았던 게 주효했다. 또 외환위기 이후 10년 동안 금융기관들이 내실경영에 힘써온 데다 자금을 단기로 운용해 리스크를 분산한 것도 일조했다.
그러나 단기자금 비중이 높고 금융시장이 작다는 것은 단점으로 작용할 수 있다. 실제로 국내 금융기관 및 기업들은 10~30년짜리 장기자금을 유치할 곳이 없어 장기 경영전략을 짜기도 어려운 실정이다.
장기자금을 유치해 경영 안정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해외 금융시장으로 진출할 수 밖에 없다.
전용식 우리금융지주 경영연구실 연구위원은 "국내 금융시장은 규모가 작고 장기자금을 운용할 곳이 많지 않기 때문에 해외시장으로 눈을 돌려야 한다"며 "홍콩과 싱가포르처럼 금융 중개소 역할을 자처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글로벌 금융시장의 패권을 장악해 온 미국 달러화의 위상이 하락하고 채권에 대한 선호도가 떨어진 것은 국내 금융시장을 세계화하는 데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
그 동안 미국 달러화가 기축통화로 활용되면서 개별 국가가 자국의 금융 및 자본시장을 육성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다. 그러나 지난해 전 세계적인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글로벌 금융시장이 미국·영국·유럽·중국·일본 등의 다극 체제로 변화했다. 국내 금융시장도 마음 먹기에 따라 얼마든지 세계 무대에 나설 수 있게 된 것이다.
국내 금융기관이 해외로 진출하고 금융시스템을 수출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초기 역할이 중요하다. 경제성장 초기 단계에 관치가 효력을 발휘했듯이 금융시장 국제화 초기에도 정부가 국제 무대에서 주도적 역할을 수행할 필요가 있다.
또 금융 관련 규제를 대폭 완화하고 해외 기관투자자 및 기업을 국내 금융시장으로 적극 유치해야 한다.
전 연구위원은 "국내로 유입되거나 거쳐가는 자금 규모가 크지 않기 때문에 금융산업 육성에 한계가 있다"며 "정부가 외환관리 규제를 풀고 국내에 안주해 있는 국내 금융기관의 해외 진출을 독려하는 한편 외국 기업을 국내 증시로 유치하려는 노력도 기울여야 한다"고 제언했다.
아주경제= 김유경 기자 ykkim@aj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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