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가 주인은 새벽임에도 불을 환하게 밝힌 채 집유차에 우유를 싣느라 바쁜 손을 놀린다. 하루 전인 지난 3일 한국낙농육우협회의 원유공급 중단 결의로 납품하지 못한 원유를 실어나르기 위해서다.
지난 3일 하루동안 일손을 놓았던 농가들이 4일 새벽부터 본격적인 집유를 시작했다. 이틀 동안이나 납품하지 못하면 보관할 냉동고가 부족해 폐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낙농가를 대표하는 낙농육우협회 측은 "지난 3일 하루 동안 집유를 하지 않은 것은 경고에 불과하다"며 "5일로 예정된 최종 협상을 통해서도 173원 인상이라는 요구조건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본격적인 '우유 버리기' 사태가 발생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적정한 선에서의 타협과 관련해서도 "절대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고 장담한다.
하지만 이러한 강경한 입장에도 불구하고, 유업계를 비롯해 일부 낙농가들은 '우유 대란'을 회의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많다.
실제 경기도의 한 대형 축사 주인은 우유 공급 중단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지적한다.
그는 "젖소는 하루에 두 번 착유를 해야 한다"며 "우유 공급을 중단하기 위해 착유를 하지 않으면 해당 부위에 염증이 생겨 젖소 자체가 병에 걸릴 위험이 높다"고 말했다. 때 맞춰 착유를 한다고 해도 많은 양을 한꺼번에 보관할 수 있는 냉각시설이 턱없이 부족한 것도 공급을 중단할 수 없는 이유다.
하지만 농가들은 원유 공급을 중단할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로 '당장의 생계가 곤란하다'라는 점을 꼽고 있다.
통상 젖소 1마리당 하루 1만원 정도의 원유를 생산한다. 30마리 가량을 키우는 일반 농가의 경우, 하루 30만원의 매출이 감소하는 것이고, 이를 월로 환산하면 900만원의 수입을 포기하는 셈이다. 때문에 100마리 이상을 키우는 대규모 농가들은 당장 하루 이틀 우유 공급을 중단할 수는 있지만 공급 자체를 중단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라는 것이다.
유업계 역시 낙농육우협회의 가격인상 명분이 약하지 않느냐는 시각에 무게중심을 두는 눈치다.
업계 한 관계자는 "현재 농가에서 가격을 인상하겠다는 이유는 구제역으로 인한 공급량 축소가 명분이다"며 "이를 역으로 생각하면 '공급량 축소'라는 칼자루를 쥔 농가들이 호재(?)를 이용해 큰 폭의 가격인상을 요구하는 꼴이다"고 지적했다. 이는 현정부의 물가정책과도 역행한다고 덧붙였다.
업계에 따르면 올해 구제역 발생으로 국내의 전체 원유 생산량이 10%가량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하루 수급량 5600톤 가운데 1/10인 560톤이 줄어든 것으로 1톤 트럭 560대 분량이다.
그동안 국내 원유 수요는 여름에는 수요와 공급 비율이 맞았지만 겨울에는 수요가 줄어 일정량을 비축할 수 있었다. 비축물량으로 치즈와 같은 유가공 제품을 만들어 성수기인 여름에 공급하는 사이클을 이어왔다. 하지만 올해는 구제역으로 인해 이러한 규칙적인 주기가 완전히 깨졌다. 일각에서 "농가들이 호기를 잡았다"고 비꼬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정부의 안일한 대응책도 도마 위에 올랐다. 물가안정 정책을 펼치고 있지만 '생존권'을 담보로 내건 농가에게 대응할 만한 방안이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 유업체들마저 "원유가가 인상되면 소비자 가격도 당연히 올라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어 진퇴양난에 빠졌다.
지난 1일과 2일 이틀에 걸쳐 정부는 농가를 대표하는 낙농육우협회와 업체를 대표하는 유가공협회 핵심 관계자들은 잇따라 만났지만 뚜렷한 결과를 도출해내지도 못했다. 정부의 물가안정 정책(소비자가격 동결)에도 부흥해야 하고, 농가의 생존권(원유가격 인상)도 지켜야 한다는 덫에 빠졌기 때문이다.
유업계 역시 소비자가격 인상과 관련해 정부의 명확한 입장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농가의 주장을 100% 수용할 수 없다는 방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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