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부자이야기] 푸야오유리그룹 ‘차오더왕’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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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1-10-31 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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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경제 홍우리 기자) 벤틀리 BMW 벤츠 아우디 GM 등 다국적 자동차회사의 공급업체로 선정되는 등 지난 30년간 눈부신 성장세를 보이며 업계의 부러움과 시기를 한 몸에 받아온 푸야오유리(福耀) 그룹. 푸야오는 현재 중국 국내 유리시장 71%, 글로벌 시장 20%의 점유율을 자랑하는 명실 상부한 업계 최고의 기업으로 발돋움했다.

푸야오의 차오더왕(曺德旺) 회장은 전형적으로 한우물만 파온 외곬수’기업인이다. 다른 기업들이 부동산 인터넷 광산 등으로 보폭을 넓힐 때 차오더왕은 우직하게 ‘자동차 유리’ 생산에만 전념해왔다. 여타 기업가들이 저마다의 모임을 통해 인적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강단에 서고 정치무대에 오르는 등 ‘스타’로서의 면모를 과시할 때도 차오 회장은 ‘관심없다’는 말로 일축했다.

차오더왕은 지금으로부터 65년 전 푸젠(福建) 푸칭(福淸)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일찍이 상하이(上海)의 유명 백화점인 융안(永安)백화점의 주주였지만 가세가 기울면서 고향으로 터를 옮기기로 결정했다.

상하이를 떠나 푸젠에 도착한 차오 일가족. 그러나 그들을 기다린 것은 지독한 가난뿐이었으며 길거리를 전전하는 신세를 면치 못했다. “어린 시절 묽은 죽 한 그릇으로 하루를 버텨야했어요.” 차오회장은 가난했던 어린시절을 이렇게 추억한다.

9세가 되던 해 차오 회장은 학교에 입학했다. 배를 곯고 추위에 내몰려도 ‘배움’에 대한 미련이 컸지만 경제적 한계에 부딪혀 14세에 교문을 나서야했다. 그러나 학교를 떠난 후에도 차오더왕은 주변에서 헌책들을 얻어보며 배움에 대한 갈증을 채웠다.

1962년, 16세의 차오 회장은 생계를 위해 돈벌이에 뛰어든다.‘돈 독이 올랐다’는 주위의 시선에도 불구하고 소년 차오더왕은 아버지와 함께 담배잎을 내다 팔았다. 20세가 된 이후에는 몸의 고생은 돌보지 않고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꼭두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과일을 내다 팔기도 했고 목이 버섯을 재배하기도 했다. 댐 건설 현장에서 막일도 하고 밥을 해주기도 했다. 1975년, 이렇게 해서 모은 돈이 5만여위안이었다.

이듬해 차오 회장은 수도계량기용 유리를 생산하는 향진(鄕鎭)기업 가오산(高山)유리공장에 취직하면서 유리와의 인연을 맺었다. 83년에는 파산 직전의 가오산을 인수, 자동차유리로 '주 종목'을 바꾸며 공장을 인수한 그 해에 무려 20여만위안을 벌어들였다. 2년 뒤에는 가오산을 합자운영 체제로 전환했고, 상하이 야오화(耀華)의 낡은 설계도를 구해 생산 설비를 재정비했다. 이 때 벌어들인 돈만 70여만위안. 그리고 다시 2년 뒤인 1987년, 마침내 푸야오유리 그룹이 탄생했다. R&D에 대한 아낌없는 투자와 세계 일류 수준의 생산 설비 시스템, 우수한 품질을 추구하며 푸야오는 일약 글로벌 자동차유리 시장 최강자에 등극했다.

“나는 기업가지 부호가 아닙니다. 돈이라는 것은 한낱 종이짝에 불과해요. 가지고 노는 장난 감과 같은 것입니다. 지폐가 있어야 가지고 놀 수 있고 생각이 없으면 없어지기 십상이에요. 내가 물려주고 싶은 것은 돈이 아니라 지혜와 인격입니다.”

2009년 차오 회장은 중국 기업가 최초로 세계 유수의 기업가들의 꿈인 언스트앤영(Ernst & Young) 최우수기업가 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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