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일 박희태 국회의장은 전당대회 돈봉투 사건에 책임을 지고 의장직을 사퇴했고, 민주통합당 박상천 상임고문은 4월 총선 불출마 선언을 했다. 같은날 20여년을 딛고 섰던 정치의 한복판에서 물러섰지만 이들의 표정은 엇갈렸다.
박 의장은 불미스런 사건과 관련, “오늘 모든 것을 짊어지고 가겠다”고 했다. 그마저도 한종태 국회대변인의 대독이었다. 불명예 퇴진이다. 그를 정치에 입문시킨 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 사건으로 구속되면서 했던 “우리 정치인들의 모든 불신과 갈등을 가슴에 안고 가겠다”는 발언과도 같은 뉘앙스다.
반면 박 고문은 젊은 후배들에게 자리를 물려주는 자리인 만큼 당당한 훈수를 이어갔다. 주된 내용은 중도진보주의다. 선거에서 중도층의 향배에 따르 승패가 결정되기 때문에 중도성향 표를 잡아야 한다. 이를 위해 진보진영은 중도진보주의자까지 포섭해야 한다는 조언이다. 지난 2007년 범여권 대통합을 앞두고 ‘친노(노무현)’인사 배제를 주장하면서도 같은 논리를 폈다. 명예퇴진이었다.
이들은 한 시대를 풍미한 55년 지기로 닮으면서도 다른 정치적 행보를 보여왔다. 동갑내기인 이들은 서울대 법대와 사시 13기 동기로 검사생활도 함께 시작했다.
그러나 박 의장은 부산지검장 부산고검장을 맡는 등 승승장구한 반면 박 고문은 순천지청장을 끝으로 검사생활을 마감했다. 그러나 법무부수장으로는 박 고문이 이겼다. 박 고문은 국민정부 출범 후 실세 장관으로 지냈지만 박 의장은 문민정부 당시 자녀의 부정입학 문제로 10일만 장관직에서 물러났다.
두사람은 13대 국회 때 나란히 정계에 진출했다. 그러나 박 의장은 여당인 민주정의당, 박 고문은 야당인 평화민주당을 선택했다. 1990년 2월 3당합당 이후 같은 시기 여야의 대변인을 맡아 입씨름을 벌여나갔다.
1991년 김대중 당시 신민주연합당 총재가 사적인 자리에서 “노태우 대통령이 김영삼 민주자유당 대표에게 대권을 줄리가 없다”고 한 발언을 빌미삼아 박 의장이 ‘정치9단의 꼼수’라고 공격하자 박 고문은 “대변인의 상스러운 말투부터 고치라”고 맞불을 놨다.
국회 법사위원으로 얼굴을 마주보고 앉아 박 의장은 ‘순발력’을, 박 고문은 ‘원칙’을 내세우며 법리 논쟁을 벌이기로 유명했다. 1993년 정치개혁특위 여야 협상대표로 정치개혁법을 만들때는 험악한 분위기도 연출했다. 박 고문이 행정구역개편의 원칙을 설파하자 박 의장은 “강의하는 기가, 치아라”며 맞섰다.
여야 수장까지 지낸 이들 동기는 정치적 시련도 겪었다. 박 의장은 2008년 18대 총선 당시 공천에서 탈락했다. 박 고문은 2003년 새천년민주당에서 열린우리당으로 분당할 때 민주당을 지키다 탄핵역풍에 17대 총선에서 낙선했다.
박 의장이 대변인 시절 즐겨쓰던 단어‘전광석화’처럼 이들의 정치인생 24년은 흘러갔고 두 노정객이 함게 쓴 의정사는 역사에 남겨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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