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을 자고 있던 중 부하들의 손에 목을 베인 장비. 장비의 머리는 창장(長江, 장강)에 버려지고 몸만 따로 랑중((閬中, 쓰촨성)에 묻힌다. 그의 머리는 창장을 따라 흘러흘러 윈양(雲陽)의 한 어부에 의해 발견돼 윈양에 묻힌다.
취재팀은 장비의 고장이라고도 불리는 바로 그 윈양에 있는 장비묘를 찾아 나섰다. 윈앙현은 우리의 첫번째 행선지인 중(忠)현에서 차로 2시간 거리며 충칭시에서 북동쪽으로 300km 떨어진 인구 135만의 작은 도시이다. 호텔에 비치된 지역신문에는 윈양현이 네티즌이 뽑은 전국최고의 행복 도시라는 기사가 실려있었다. 과연 공원에는 아침부터 춤과 노래를 즐기고 태극권을 연마하는 사람들로 활기가 넘쳤다. 그들의 모습에는 스트레스가 없어보였고 행복감이 충만해 보였다.
이른 아침 윈양현의 한 광장에서 사람들이 모여서 노래를 배우고 있다. |
우리를 안내하던 안내원은 “윈양현 사람들은 장비의 몸은 랑중에 있지만 그의 영혼은 여기 윈양현에 있다고 믿는다”며 “바로 윈양현이 장비의 정신과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고 자랑했다. 안내원의 말에서 이 곳 사람들의 장비에 대한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다.
장비묘로 가는 길에는 창장(長江)이 시원하게 흐르고 있었다. 장비의 무기인 장팔사모처럼 곧게 뻗어 힘차게 흐르는 창장을 따라 장비 벽화가 조성되어 있었다. 이 곳의 벽화는 2003년에 조성되었는데 그 길이가 100m는 족히 되어 보였다. 전장에서 말을 타고 달리는 장비의 힘찬 모습과 함께 난강비(鸞降碑)라는 시가 적혀있었다.
창장을 바라보는 곳에 거대한 장비 벽화가 조성되어 있다 |
壹把鐵槍扶社稷,三尺銅劍振乾坤 (일파철추포사직, 삼척동검진건곤)
先生不知余名姓,赤膽黑面老將軍 (선생불지여명성, 적담흑면노장군)
- 扶漢張將軍 (포한장장군)
하나의 철창으로 사직을 받들고, 삼척의 동검으로 천지를 뒤흔드네
이 사람이 누구냐고 물어보면, 충직하고 용맹한 노장군이라 한다
-한(漢) 나라를 지킨 장군 장씨
이 시는 꿈 속에서 장비가 나타나 읊은 것을 기록한 것이라는 얘기가 전해져 오고 있다. 시를 통해 장비의 기개를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창장을 따라 차를 타고 조금 더 이동하자 언덕 위에 장비묘가 나타났다. 장비묘는 사실 지금의 이곳에 있기 까지 곡절이 많았다. 1870년 청나라 동치제 때 큰 홍수가 있었는데 이 때 많은 부분이 손상되었다고 한다. 1875년 개축을 거쳐 지금의 모습으로 태어나게 되었다. 하지만 세계 최대 규모의 치수공사인 싼샤댐의 건설로 2003년에 지금의 위치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당시 기록에 의하면 장비묘는 싼샤댐으로 인해 옮긴 시설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비용이 많이 들었다고 한다. 80%를 그대로 옮겼다고 하는데 옮기는데만 4000만 위안(한화 약 71억원)이 들었으며 기타 도로 공사와 같은 기초 공사까지 합하면 약 1억2000만 위안이 들었다고 한다. 1700여년 전에 지어진 건물을 산 위로 옮기는 것이 보통 일은 아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장비는 죽을 때도 목을 창장에 내어주고 죽어서도 홍수로 고생했고, 치수공사로 다시 한번 난리를 겪어 물과 악연이 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비묘의 입구. 유비가 묻힌 청두(成都) 무후사(武侯祠)를 보고 있다. |
장비묘의 입구는 앞에서 바라볼때 비스듬한 모양을 띠고 있다. 안내원은 “장비묘가 북서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이는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다. 유비가 있는 쓰촨성 청두의 무후사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지요. 죽어서도 계속되는 큰 형 유비에 대한 장비의 그리움을 나타내는 것이죠”라고 하였다. 마치 유비가 자리에서 일어나 이 곳의 문을 통해 “아우야” 하며 동생 장비를 찾아 올 것만 같았다.
입구 위에는 ‘장항후묘(張桓侯廟)’라고 쓴 현판이 있는데 이는 유비의 장남이자 촉한의 마지막 황제 유선(劉禪)이 장비가 죽고나서 내려준 시호로써 ‘용감하다’라는 뜻을 담고 있다고 한다.
또한 입구 주변에는 ‘강상풍정(江上風淸)’이라는 현판이 크게 걸려있었다. 이 현판은 청나라 때 윈양현 사람 펑쥐신(彭聚星)이 쓴 것으로 사람들이 청빈한 삶을 살기를 바라는 염원을 담았다고 한다. 그는 당대 유명한 서예가였으며 장비묘를 기념하기 위해 유명한 서화작품을 이 곳 장비묘에 모아 전시해 두었다고 한다. 실제로 1층에 황정견의 시를 비롯하여 2층에 소식, 악비 등 유명 서화가들의 여러작품이 전시되어 있었다.
1층에 전시되어 있는 황정견의 시 |
장비묘의 3층에 이르자 커다란 청동 장비상이 우리 취재진을 맞았다. 원래 싼샤댐으로 옮겨오기 전의 사당에서 장비상은 흙으로 만들어졌고 아름다운 채색이 되어 있었으나 2003년에 이 곳으로 옮기면서 청동으로 다시 제작되어 안치되었다. 안내원의 말에 의하면 사람들은 위엄있는 청동상도 좋아하지만 장비의 인간미와 친근감이 드러나는 이전의 채색 장비상을 더 그리워한다고 하였다.
청동으로 만든 장비상. 위엄이 느껴진다 |
장비의 생일인 음력 8월 28일이 되면 사람들이 해마다 이 곳에 들러 저마다 소원을 빌곤한다. 이 때 꼭 3가지의 선물을 들고 오는데 첫째가 향 또는 초이며 둘째는 홍포(붉은 천)고 세번째는 식용유라고 한다.
특히 홍포는 기복적인 성격이 강한데 사람들은 홍포를 이 곳에 걸고 소원을 빌며 또한 가정에 대소사가 있을 때 이 곳의 홍포를 가져가서 불운을 막고 복을 빈다고 한다. 말을 듣고 보니 조금전 우리의 취재를 방해했던 시끄럽던 폭죽 놀이가 떠올랐다. 이 곳 사람들은 자동차를 사게 되면 장비묘 앞 공터에 차를 가져와서 폭죽을 터뜨리며 일종의 고사를 지내며 안전을 기원한다고 한다.
장비묘 앞 공터에서 사람들이 폭죽을 터뜨리며 잡귀를 쫓고 행운을 빈다. |
식용유에 얽힌 설명은 꽤 재미있었는데 예전에 이 곳을 지키던 늙은 스님이 있었다고 한다. 그 스님은 참배객들에게 “장비머리가 식용유에 담궈져 있어야 썩지 않는다”며 사람들로 하여금 식용유를 가져오게 했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직까지 식용유를 들고 이곳을 찾는다는 것이다.
청동 장비상의 좌우에는 장비와 관련된 이야기들이 역시 청동 조각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가장 우측은 장비가 탐관오리였던 독우(督郵, 마을을 순회하면 감독하는 관직)를 매질하는 모습이었고, 그옆은 장비가 엄안(嚴顔)의 당당한 모습에 탄복하여 엄안을 사로잡았다가 풀어주는 모습이었다. 또 좌측에는 장판교에서 장비가 호통치며 적들을 위협하는 모습, 가장 왼쪽에는 장비가 자고 있는 사이 부하인 범강과 장달이 장비를 죽이러 들어가는 장면이 있었다.
장비의 일대기를 담은 조각상을 바라보고 있으니 삼국지 영웅들의 파란만장한 일생이 파노라마처럼 스쳐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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