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 지미 카터 대통령 시절로 올라가면 1979년 11월4일 이란 학생들이 테헤란 주재 미국 대사관을 점거하고 무려 52명의 미국인을 인질로 잡았다. 당시 카터가 사용했던 어떠한 경제적 정치적 압력도 통하지 않았고, 최종 수단으로 사용했던 1980년 4월 헬리콥터 특수부대 구출 작전도 실패로 돌아갔다.
무기력한 정부의 모습에 대중들은 분노했고, 로널드 레이건 당시 공화당 대선 후보가 이를 효과적으로 공격했다. 결국 카터는 그해 11월에 실시된 선거에서 큰 표차로 레이건에게 패한다. 이란 정부가 1981년 레이건이 취임한 직후 모든 인질을 석방해 인질 석방을 대선 이후로 미뤄 달라는 요청을 레이건이 했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미국 시민을 대상으로 한 테러 소재를 잘 공략해 대통령에 당선된 레이건은 재임시절 레바논에서 엄청난 상황에 직면해야 했다. 민주당의 월터 먼데일 후보가 도전장을 내밀었던 상황에서 1983년 두 건의 대규모 테러가 발생했다. 레바논의 미국 대사관에서 폭탄 테러가 일어나 무려 63명이 사망했고, 또한 베이루트 미 해병대 막사에서 폭탄 테러가 발생해 무려 241명의 군인이 사망했다.
당시 이란을 공격하는 안까지 검토됐지만, 레이건은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 또한 “미 해병대는 계속 레바논에 주둔할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선언했지만, 레이건은 1984년 2월 해병대를 철수시킨다. 미국 대통령으로서의 체면이 영 서지 않았던 때였다. 먼데일 민주당 후보는 그같은 비상 시국에서 결단력을 보이지 못한 레이건의 약점을 공략했으나, 1984년 선거에서 레이건은 재선에 성공하게 됐다.
1988년 당시 조지 H.W. 부시 부통령과 민주당의 마이클 듀카키스가 대선에서 맞붙었을 때는 다행히도 국내외에서 큰 테러는 없었지만, 레이건 행정부 시절 부시 후보의 국방 매파 역할이 논란이 됐었다. 듀카키스 후보는 부시가 레바논 테러 등을 도운 혐의가 있는 이란에 미국 군수물자 판매를 도와준 혐의가 있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면서 듀카키스 후보는 해외 테러가 일어나면 반드시 군사작전을 통해 적들의 음모를 분쇄하겠다고 단언했었다.
그러나 부시 후보는 TV 토론 등에서 “1986년 레이건이 리비아의 수도 트리폴리 공습을 반대한 듀카키스는 위선자”라고 공격했다. 선거 결과는 부시 공화당 후보의 승리였다.
4년 후 1992년 대선에서는 테러 보다는 경제적인 문제가 큰 이슈였으나 레이건과 부시 행정부가 중동의 문제아 사담 후세인 이라크 정권을 도왔다는 야권의 공세가 통했다는 지적도 있다. 결과는 민주당의 빌 클린턴 민주당 후보의 승리였다.
이처럼 미국 대통령 선거 결과는 테러와 그에 따른 군사작전의 결과가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분석된다. 지난 2008년 존 매케인 후보의 캠프 자문관이었던 챨리 블랙은 “테러와 전쟁이 일어나면 공화당 대선 후보가 유리하다”고 말했다가 나중에 유권자들에게 공개 사과를 하기도 했다. 미국 시민의 목숨이 달린 문제를 놓고 정치적인 득실을 말한 것은 도덕적으로 용납될 수 없다는 비판이 들끓었기 때문이었다.
현재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수년간 지속된 경제난에 중동의 반미 테러 위기에 직면해 있다. 리비아에서는 영사관이 공격을 당해 대사까지 목숨을 잃었다. 만일 블랙의 말이 옳다면 민주당 오바마의 재선은 물건너갔다고도 할 수 있다. 아직까지는 오바마의 지지도가 미트 롬니 공화당 후보보다 소폭 높다. 미국 대선 결과를 예측하기 어렵게 하는 변수가 해외에서 요동치고 있다.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