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초라했지만 그 끝은 장대했다' <1>
13명 창당, 준의회의, 11기3중전회 이어 18차 당대회까지
아주경제 베이징 특파원 조용성 기자 = 중국 공산당의 시작은 매우 초라했다. 1921년 7월 23일 중국 공산당 1차 전국대표대회(1차 전당대회. 창당대회)가 열린 곳은 상하이(上海)의 프랑스 조계지(租界地) 내 왕즈루(望志路)로 106호(지금은 싱예루)의 1층 벽돌 주택이었다. 1차 당대회에 참석했던 대표 13명 중 한명이었던 리한쥔(李漢俊)의 집이었다. 당시 당원은 모두 53명이었다.
이후 당국의 순찰에 발각돼 7월 30일 회의 장소를 저장(浙江) 성 자싱(嘉興)의 난후(南湖)호수에 떠 있는 작은 유람선으로 옮겼다. 길이 16m, 폭 3m의 작은 목선에서 당의 명칭과 당 강령 등을 통과시키며 초라하기 그지없는 1차 당대회를 마무리했다. 1차 당대회에는 마오쩌둥(毛澤東)과 장궈타오(張國燾) 등 대표 13명과 코민테른(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을 대표해 네덜란드인 마링 등 2명이 참석했다. 중국은 역사적인 상하이 1차 당대회 건물을 1952년 9월 복원시켜 관광지로 일반에 공개했다. 시진핑(習近平) 국가부주석이 과거 상하이시 서기에 취임하면서 가장 먼저 찾은 곳도 1차 당대회 건물이다.
창당 이듬해인 1922년 7월16일 역시 상하이에서 제2차 당대회가 개최된다. 민주혁명을 통한 공산혁명으로의 2단계 혁명론이 채택됐다. 세계대세와 중국공산당에 관한 결의안과 국제제국주의에 대한 결의안 등이 통과됐다. 1923년에는 제3차 당대회가 광저우(廣州)에서 개최됐다. 회의에서는 노동운동, 농민문제, 청년운동, 여성운동 등에 대한 결의안이 통과됐다. 1925년에는 제4차 당대회가 상하이에서 개최됐다. 그리고 1927년에는 5차 당대회가 우한(武漢)에서 열렸다. 6차 당대회는 1928년 모스크바에서 개최됐으며 10대 정치강령이 제정됐다. 창당 초기에는 거의 매년 당대회가 열리다시피했다. 53명이었던 당원은 4만명으로 불어났으며 후난(湖南)성, 장시(江西)성 등으로 외연이 확대됐다.
하지만 당시 중국공산당은 장제스(蔣介石) 국민당군의 매서운 공격을 받아야만 했다. 1930년 국민당은 10만병력을 동원해 징강산(井岡山)을 거점으로 하는 공산당을 공격했지만 실패했다. 1931년 국민당은 다시 20만병력을 동원했지만 역시 실패했고 그해 7월 다시 30만대군을 동원했지만 공산당의 방어를 뚫지 못했다. 고무된 공산당은 1931년 장시성 루이진(瑞金)에서 중화소비에트공화국 수립을 선포했다. 이에 위협을 느낀 장제스는 1932년 50만병력을 동원해 공산당 토벌에 나섰다. 이마저도 실패하자 장제스는 그해 10월 무려 100만대군을 동원한 제5차 공격에 나서서 공산당을 회복불가능한 상태로 패퇴시켰다.
참패를 한 공산당은 1934년 10월 국민당군의 공격을 벗어나기 위한 대장정에 돌입한다. 공산당군은 1936년 10월 산시(陝西)성 옌안(延安)에 도착할 때까지 9600km를 행군했다. 처음 출발 인원 8만6000여 명 중 7000여 명만이 살아남았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역사적인 준의회의가 개최된다.
준의회의는 1935년 1월 대장정도중 구이저우(貴州)성 준의(遵義)에서 열린 중앙정치국확대회의를 말한다. 회의에서 마오쩌둥은 당시 당권을 쥐고 있던 소련 유학파들을 격렬히 비판했다. 그들의 잘못된 전술이 공산당의 참패를 가져왔다는 마오쩌둥의 주장에 공산당 지도부들은 적극적인 지지를 표명했다. 그리고 마오쩌둥은 준의회의에서 당권은 물론 군권까지 움켜쥐며 공산당에서 절대적인 위치에 오르게 된다.
마오쩌둥의 1인지배체제가 확립되자 당대회는 한참동안 열리지 않았다. 그 후 일본 패망을 앞둔 1945년 4월23일부터 6월11일까지 2개월여간 제7차 당대회가 옌안에서 개최됐다. 마오쩌둥은 “중국의 앞에는 광명의 중국과 어둠의 중국이라는 두가지 운명이 있다”며 “일본 침략자를 물리치고 광명의 신중국을 세우자”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리고 그해 일본군은 중국에서 철수했고, 이어 벌어진 국공내전에서 공산당이 승리했다. 1949년 10월1일 중화인민공화국이 창립됐다.
신중국 성립 6년후인 1956년 8차당대회가 개최됐다. 이 회의에서는 주로 사회주의 경제건설방안이 집중 논의됐으며 제2차5개년규획이 통과됐다. 10년후인 1966년 중국에는 문화대혁명이 발발했다. 무지막지한 극좌 사회주의 계급론이 횡행했고 전중국이 대혼란으로 빠져들었다. 문혁이 한창이던 1969년 제9차당대회가 열렸다. 린뱌오(林彪)는 정치보고에 나서 ‘무산계급집권하의 계속되는 혁명이론’을 발표해 문혁을 적극 옹호했다. 그리고 마오쩌둥의 후계자로 린뱌오가 지명됐다. 하지만 린뱌오는 1971년 쿠데타를 기도했다가 실패했다. 그리고 러시아로 탈출하던 중 비행기 추락사고로 사망했다. 1973년 열린 10차 당대회에서는 린뱌오 쿠데타 사건 및 추락사가 공표됐다.
1976년 마오쩌둥이 사망하면서 문화대혁명은 종결된다. 그리고 이듬해 제11차 당대회가 소집된다. 이 때부터 당대회는 5년을 주기로 정기적으로 개최되오고 있다. 11차 당대회에서는 10년간의 문화대혁명이 끝났음을 선포했으며, 사회주의 현대화 강국을 건설하자는 임무를 거듭 표명했다. 그리고 11기1중전회(중국공산당 제11기 제1회 중앙위원회 전체회의)는 화궈펑(華國鋒)을 주석으로, 덩샤오핑(鄧小平)을 부주석으로 선출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78년12월 역사적인 제11기3중전회가 개최된다. 당시 중국은 문화대혁명의 악몽에서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고자 했다. 하지만 화궈펑은 문혁을 기반으로 성장한 인물이었기에 민심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11기3중전회는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정책을 공산당 주요방침으로 승인했다. 자연스레 반대파인 화궈펑은 권력을 잃게 됐고 덩샤오핑 1인체제가 구축됐다. 과거 중국공산당의 최고 목표는 무산계급혁명이었지만 11기3중전회를 계기로 최고목표는 경제건설로 대전환됐다. 이후 중국은 개혁개방노선을 견지하며 최빈국 수준에서 G2대국으로 올라서게 된다.
1982년 제12차 당대회가 개최됐다. 덩샤오핑은 개막사에서 “중국식 사회주의를 건설하자”라고 주장했다. 덩샤오핑은 군사위 주석을 맡았고 공산당 총서기에 후야오방(胡耀邦)을 발탁했다. 5년후 열린 제13차 당대회에서는 자오쯔양(趙紫陽)이 공산당 총서기에 올랐다. 1989년 톈안먼(天安門)사태가 발발하자 자오쯔양이 물러서고 장쩌민(江澤民)이 총서기에 등극했다. 톈안먼사태 이후 중국에서는 개혁개방에 대한 반대여론이 일어났다. 하지만 1992년 2월 덩샤오핑이 남순강화에 나서고 1992년 10월 제14차 당대회에서 장쩌민이 사회주의 시장경제체제의 개혁목표수립을 명확히 밝히면서 중국은 더욱 개혁개방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1997년 2월 덩샤오핑이 사망했다. 그리고 그해 9월 열린 제15차 당대회는 덩샤오핑이론이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사용했으며 중국공산당 헌장에 덩샤오핑이론을 당의 지도사상으로 삼는다고 규정했다. 2002년 16차당대회에서는 후진타오(胡錦濤)가 당 총서기에 올랐다. 그리고 장쩌민의 3개대표이론이 당헌장에 삽입되, 장기적으로 당이 견지해야 할 필수 지도사상으로 삼았다. 3개대표이론이란 중국공산당은 선진생산력, 선진문화, 대다수인민의 근본이익 등 세가지를 대표한다는 게 골자다. 이로 인해 자본가의 공산당 입당이라는 역사적 조치가 취해졌다.
2007년 17차당대회에서는 후진타오 총서기의 과학적발전관이 당장에 포함됐다. 11월 8일 18차 당대회에서 후진타오의 바톤을 잇는 5세대 시진핑 지도부는 창당 100주년(2021년)의 과업을 마무리하고 공산당의 또다른 100년 비전을 설계하는 사명을 부여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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