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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인과 함께 떠나는 명품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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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2-11-23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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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진작가 이지누

사라져버린 것에 대한 그 아련한 아름다움

아주경제 최병일 기자= 폐사지(廢寺址)가 있습니다. 예전에는 절이었지만 지금은 터만 남은 곳입니다. 절에 있던 스님도 모두 떠나고, 절도 부서져 적막하고 황량하기만 합니다. 이런 곳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전에는 절집을 좋아했는데 사람들의 부산거림이 싫어지더니 이제는 소슬한 바람 솔향기와 흙냄새만 풍기는 폐사지가 더 마음속에 와 닿는다고 합니다. 그 사람이 바로 이지누 선생입니다. 직접 가서 눈으로 보지 않으면 한 줄도 쓰지 못하는 치열한 작가의식으로 수백 군데 폐사지를 몇 번씩이고 답사했습니다. 1987년부터 시작한 폐사지 답사는 어느새 25년을 넘었습니다. 인생의 절반가까이를 폐사지에서 보낸 셈입니다. 이지누 씨는 폐사지에서 한소식(깨달음)을 얻은 것 같습니다. 스치는 바람이 들려주는 무언의 메시지를 느끼고 고적한 풍경속에서 내면을 보듬게 되었습니다. 마음이 어지럽고 가슴이 시리다면 폐사지를 찾아 조용한 위안을 받아보는 것은 어떨까요?

고달사지터에 대해 설명해주는 이지누 선생

남한강에 웅장하게 버티고선 이포보를 따라 혜목산을 넘어서면 그 옛날 번성했던 절터가 한눈에 들어온다. 이곳이 바로 천년 세월을 흔적을 담고 있는 고달사지 터다. 고달사지는 신라 경덕왕 23년(764)에 처음 세워진 후 고려시대에 대규모 사찰로 성장했던 곳이다. 얼마나 절이 컸던지 사방 30리가 절 소유의 땅이었고 수 백명의 스님들이 도량에 넘쳤다고 한다. 도량이 웅장했다는 것은 당시 지배자들의 보호가 없었으면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고달사지의 유적들은 폐사지의 것이라고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뛰어난 완성미와 디테일을 자랑한다. 이지누 씨는 고달사지의 부도를 볼때마다 “기가막히다”는 표현을 쓴다. “부도탑에 새겨진 문양들을 보세요. 하나하나의 선이 살아있어요. 심지어 귀부의 발톱까지 정밀하게 새겨져 있어요. 보이지 않는 곳까지 문양을 새겨놓으려면 얼마나 많은 석공의 노력이 필요했겠습니까? 이것 하나하나가 바로 돈입니다. 당시 최고 권력자의 지원이 없었다면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었겠지요.”

비문을 소개해주는 이지누씨

고달사지의 유적은 국보 제6호인 고달사지 부도를 비롯해 원종대사의 행적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는 탑비로 975년에 만들었는데 통일신라말에서 고려시대 초기로 넘어가는 탑비 형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고달사 원종대사혜진탑(보물제 7호) 고려시대 부도의 조각수법이 잘 나타나 있는 묘탑이 화사한 모습을 하고 쓸쓸한 폐사지를 지키고 있다. 그밖에 고달사지석불(보물 제 8호)과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긴 고달사지 쌍사자석등(보물제 282호)이 있다.

일설에 의하면 고달사지의 유적들은 고달이라는 석공이 만들었다고 한다. 고달은 혼을 담아 빼어난 유적을 만들었지만 가족들은 모두 굶어죽었다니 무척이나 이기적인 사람이었나보다. 고달은 고달사가 창건되고 나서 스스로 머리를 깎고 도를 이루어 큰 스님이 되었다고 한다.

고달사지 부도탑의 정경

고달의 한과 불교에 대한 집념이 뭉쳐서 만들어진 유물이어서인지 하나같이 강건하고 꿈틀거리는 기상을 느끼게 한다. 고려 광종이후 기록이 없어 그토록 융성했던 고달사가 언제 어떻게 없어 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속설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화재로 전소된 것으로 전해 지고있다.

“고달사지 터는 제가 여러번 돌아보았던 곳입니다. 사람들이 오가지 않고 한적하면서도 소슬한 바람이 불어와서 가끔씩 둘러 머리를 식히기도 했지요.”

이지누 씨가 폐사지를 마음에 두기 시작한 것은 1987년 말이었다. 유홍준 교수의 미술사 강좌를 들었던 화가와 박사논문을 준비하던 대학원생과의 만남이 계기가 되었다. 마침 대학원생이 신라 말 고려 초에 형성된 9개의 산문인 구산선문에 관한 논문을 준비하고 있었다. 논문을 위해 여러 사찰을 돌아다니면서 불교와 가까워졌고 수없이 많은 절을 쫓아다녔다.

그러다 문득 절집의 부산스러움 조차 싫어졌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자기만의 시간을 갖고 싶었다.
“절에 가면 명상이 안되고 명상을 하고 싶으면 절터로 가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절터에서 가만히 산책을 하면 천년의 세월이 그대로 들어옵니다. 어떤 때는 절터에서 바람부는 소리를 듣는 것이 훨씬 나을 때도 있습니다. 낙엽지는 모습을 보는 것이 마음 수련을 위해 훨씬 나을 때도 있습니다.”

그때문에 이지누 씨는 육신의 병이 들었을때도 폐사지 기행을 멈추지 않았다. 지난해 이지누 씨는 생사의 고비를 넘었다. 병원에서는 간암 말기라고 했다. 20일도 못살 것이라고 했는데 부처님의 은덕인지 지금까지도 여행을 계속할 수 있었다.

“여행은 자기와의 싸움입니다. 어느 경지를 넘어가면 여행이 그저 단순히 쉬어지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여행이 쉬는 개념이 되는데 직업이 되면서 생각이 많아집니다. 어떤 때는 절마당에 낙엽이 비처럼 내리는것을 서너시간 바라보기만 할때도 있습니다. 참회와 반성때문입니다. 고요한 미명아래 마애불을 바라보며 모든 일을 합리화시키는 나와 반성하려는 나와 싸우는 것이죠. 그러다 보면 어느새 두 마음이 화합합니다. 그럴때 글을 씁니다.”

요즘 그는 절과 선비들과의 만남을 주제로 한 책을 계획하고 있다. 한국에 수없이 많은 절을 빼고 여행을 떠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면 불교적인 내용이 아닌 좀더 다양한 가치를 전해주면 어떨까 하는 것이 화두가 되었다. 모든 종교인들이 아무 이물없이 절을 다니고 그속에 숨겨진 이야기와 역사적인 가치를 발견하는 조금만 디딤돌이 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어느덧 사방은 긴 그림자가 고달사지 부도에 길게 드리웠다. 폐사지를 바라보는 이지누 씨의 눈은 더욱 깊어졌고 떠나는 사람들의 숙명처럼 그이의 등뒤에도 어둠이 밀려왔다.

이지누 선생이 추천하는 폐사지 3선(選)

불사의방_동살을 받은 불사의방, 오른쪽 가운데 움푹한 곳이 암자터다.

◆ 변산 ‘불사의 방’터
불사의방은 암자터다. 그곳에 가려면 밧줄을 잡고 7m 남짓한 바위벽을 내려가야 한다. 하지만 남은 흔적이라고는 암자가 바람에 날려 떨어지지 못하게 굵은 철사로 얽어맸던 쇠말뚝과도 같은 큰 못 하나뿐이다. 또 발 디딜 수 있는 공간이라고 해 봐야 겨우 한 평 반 남짓이며, 그것도 천길 절벽 위다. 자칫 몸의 중심을 잃으면 금세 구시골 골짜기로 곤두박이고 마는 험한 곳이다.

그곳에 위험을 무릅쓰고 가는 까닭은 진표율사 때문이며, 그는 백제 땅에서 출현한 몇 안 되는 고승이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그가 아직 젊었던 20대 초반, 깨달음을 구하기 위해 불사의방에서 3년 남짓 수행을 했다. 절벽 아래로 몸을 던지기도 하고, 스스로 자신의 몸을 망가트리는 가혹한 수행인 망신참법을 행하며 말이다. 그 지극한 정성에 감복한 미륵보살과 지장보살이 다가 와 그를 어루만졌다.

불사의방의 치명적인 매력은 그 가혹함에 있다. 천길 절벽이라는 지리적인 조건도 그렇지만 수행과정 또한 그렇다. 그래서 자주 가게 된다. 그것도 훤한 대낮에 올라서 별이 찬란하게 빛나는 밤이 지나고 달이 하얗게 될 때까지 철야정진을 한다. 까만 밤, 나를 되돌아보면 전율이 일 정도로 삶에 대한 반성이 깊어지기 때문이다.

보령 성주사터 전경

◆보령 성주사터

보령의 성주사터에는 석조유물이 많이 남아 있다. 최치원의 사산비명 중 하나인 국보 제8호인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와 보물 제19·20·47호로 지정 된 석탑 3기 그리고 유형문화재로 지정 된 석탑 1기와 석등 1기가 있다. 또 금당의 석불대좌를 비롯하여 허물어진 전각을 받치고 있었을 초석들이 흩어져 그 옛날의 영화를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이 그곳에 있다.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신라 하대에 성주사터로 중창 될 당시 이곳에 머물렀던 이는 낭혜화상 무염(無染 801~888)이다. 그가 남긴 말이 절터 곳곳에 떠돌고 있는데 대개 이런 것들이다.“저 사람이 마신다고 나의 갈증이 풀리지 않고, 저 사람이 먹는다고 나의 배고픔을 채워주는 것이 아니다”“대개 나와 같은 것을 한다고 해서 옳은 것은 아니고, 나와 다르다고 해서 그르지는 않은 것이다.”

위의 말은 네 힘으로 스스로 노력하여 모든 것을 구하라는 것이며, 아래는 스스로 노력 할 뿐 상대를 탓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 말이 절터에 있는 그 어떤 석조유물들 보다 아름답다. 마음이 허할 때 따끔한 한마디 말을 들으러 가는 곳, 바로 성주사터다.

영암용암사터 국보 제144호인 월출산 마애여래좌상

◆ 월출산 용암사터

이른 새벽 시간, 용암사터로 가기 위해 걷는 산길을 언제나 아름다웠다. 계절이 마땅치 않았더라도 아름다울 수 있었던 까닭은 길 위에 있는 나 스스로가 그곳에 간다는 설렘으로 들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아름다우면 세상천지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는 법이다. 한 시간 남짓, 바람재를 지나 구정봉에 오르고 나면 절터가 지척이지만 결코 서두르지 않는다. 마치 첫사랑의 연인을 다시 만날 때처럼 설레지만 더디게 간다.

능선 위에서 탑과 맞닥뜨려도 마찬가지다. 아! 하고 경탄의 신음을 흘리면서도 바라보기만 할 뿐이다. 그처럼 멀리서 보이는 용암사터의 탑은 아득한 그리움과 함께 연민을 자아낸다. 용암사터의 매력은 그것이다. 물론 절터에 있는 국보 제144호인 월출산 마애여래좌상도 아름답지만 나는 용암사터에 갈 때 마다 허공에게 묻는다. “누가 눈물겨운 그곳에 절집을 지었는가.”하고 말이다.

이지누 선생

◆ 이지누 작가는 한국문화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사찰과 우리 문화를 되새기는 작업을 하고 있다. 80년대 후반 구산선문 답사를 하며 불교문화를 익혔다. 퇴옹 성철스님 다비식을 시작으로 우리 시대 큰 스님들의 다비식을 사진과 글로 기록하고 있다. 2001년에는 한국 문화를 깊이 있게 다룬 계간지 ‘디새집’의 편집인으로 창간을 주도했으며 불교신문의 논설위원을 지내기도 했다. 불교문화외에도 민통선이나 비무장지대에 대한 사진작업을 진행했다. 현재는 지난 25년간 꾸준히 작업해온 폐사지에 대한 인문학적인 조사와 사진 기록을 토대로 집필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전라도 지역의 폐사지 기록서인 ‘마음과 짝하지 마라 자칫 그에게 속으리니’‘돌들이 끄덕였는가 꽃들이 흔들렸다네’(알마) 를 비롯해 ‘절터 그 아름다운 만행’(호미) 이지누의 집이야기(삼인) 등의 다양한 서적을 내놓은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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