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학교에서는 ‘반공교육’이 없어서는 안 될 과목 아닌 과목처럼 여겨졌다. 때가 되면 학교마다 그리고 지역마다 반공 웅변대회와 그림그리기대회, 그리고 백일장이 열리곤 했다. 그림그리기 대회의 주제는 당연히 ‘반공’이었고 너나 할 것없이 북한의 김일성 주석을 포악한 돼지로 그린 다음 새빨간 물감으로 채워 넣었다.
북한은 언제나 우리 머리 속에 ‘괴뢰’라는 이름의 무시무시한 짐승으로 새겨졌고, 언제나 하루 빨리 없애야 대상이 되었다. 표어 짓기 대회를 할라치면 그 어린 아이들 입에서 ‘처부수자’ ‘때려잡자’라는 험한 단어가 서슴없이 튀어 나왔다.
하지만 그 때는 그게 맞는 줄 알았다. 이승복 어린이의 입을 찢은 무장공비의 그림을 보며 우리는 늑대를 떠 올렸고, 만화 영화 ‘똘이장군’에 나오는 돼지 두목과 북한의 김일성 주석을 오버랩 시켰다.
그러던 중 언제부터인가 ‘그런건 다 거짓말이야’라는 소리기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승복 어린이의 이야기도 다 거짓말이고 북한 사람들도 우리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으며, 북한과 관련된 많은 부분이 정부에 의해 조작된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미국에 와서도 그러한 이야기를 종종 듣게 되었는데, 특히 천안함 폭파사건이 일어난 뒤 한국 정부가 진실을 왜곡하고 사건을 조작했다는 일부 한인동포들의 주장은 많은 이들의 관심을 끌었다. 천안함 폭파는 북한의 만행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워싱턴DC 수도권지역의 학자와 민간단체는 자신들의 주장을 알리기 위한 토론회를 개최하는가 하면 주미한국대사관과 백악관으로 가서 한국정부를 비난하는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보수단체도 가만히 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천안함 사건은 북한의 소행이며 이를 의심하고 한국 정부를 비난하는 이들을 종북, 친북 세력이라며 규탄했다.
하지만 이러한 워싱턴지역 보수단체의 외침은 일반인들에게 제대로 전해지지 못했다. 한국전쟁을 치룬 고령의 전쟁세대가 중심이 되어 움직이는 대부분의 보수단체는 일반인들에게 설득력 있게 다가가지 못하고 자신들만의 친목단체 쯤으로 비춰진 지 오래다.
최근 워싱턴지역의 보수단체들이 다시 손을 잡고 일어섰다. 한국 총합진보당의 이석기 의원이 내란음모 등의 혐의로 수사를 받기 시작하자 이 의원과 종북세력을 규탄하기 위한 대규모 집회를 갖기로 한 것이다. 한미애국총연합회는 지난 3일 버지니아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국가전복을 음모한 종북좌파 뿐만 아니라 워싱턴 지역에서 활동하는 종북좌파를 강력히 규탄한다’면서 ‘종북좌파의 척결을 위해 보수세력이 하나로 집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들은 또 규탄대회와는 별도로 워싱턴 동포사회에서 진보를 표방하며 활동하는 종북단체들에 대한 모니터링을 강화하기로 하고, 종북단체들이 위법행위를 했다고 판단될 경우 미국 사법당국에 신고하고 법적대응을 하겠다고 밝혔다. 그동안 자칭 진보라는 이름으로 한국정부를 비판하던 이들을 눈의 가시처럼 여기고 있던 차에 보수세력은 이번 이석기 의원의 사건을 계기로 워싱턴에서 이들을 아예 몰아낼 작정인 것 같다.
하지만 이러한 모습을 지켜보는 워싱턴 지역 한인동포들은 자칫 보수와 진보, 또는 보수에서 종북이라고 부르는 세력간의 갈등으로 한인사회가 분열되지나 않을까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두 진영이 서로의 이념이나 가치를 비판하는 수준이 아니라 서로를 감시하고 법적대응으로까지 간다면, 그것은 고국을 떠나 멀리 미국 땅에서 서로를 돕고 의지하며 살아야 할 동포사회에 이롭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아직 이석기 의원의 혐의가 다 밝혀지지 않았다. 그리고 앞으로 재판도 남아 있다. 외국에까지 나와서 같은 민족끼리 서로에게 날선 칼을 겨누는 것은 결코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다. 오해가 있으면 대화로 풀고, 잘못이 있으면 법의 심판을 받게 하면 된다. 사실 확인 없이 같은 동포를 돼지로 그리고 늑대로 그리는 일은 이제 없었으면 좋겠다. 많은 한인들은 한국정부가 이번 이 의원 사건을 오해의 소지가 없도록 투명한 수사를 통해 명명백백하게 잘잘못을 가리고, 진실이 무엇인지 밝혀주길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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