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일주일 전 개통한 호남선 KTX를 타고 서울 용산역을 출발한 10일, 광주송정역까지는 2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주말 친구 결혼식에 참석차 고향인 광주행 KTX에 오른 회사원 구자윤(30·서울 목동)씨는 “호남 KTX가 개통 되니 너무 편해요. 기차도 깨끗하고. 이전에는 고속버스 타고 4시간 넘게 걸렸는데, 서울-광주 오가는 부담을 한결 덜었어요”
그러나 구씨는 이내 이렇게 편한 호남 KTX가 지역차별 땜에 너무 늦게 개통됐다면서 정권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그는 “사실 대구나 부산이었으면 벌써 개통하고도 남았지. 영-호남 차별 안한다면서 솔직히 이명박-박근혜 정권 들어 더 심해졌어요. 아따, 갑자기 허천나게(매우) 열받네요잉”라며 갑자기 사투리를 쓰며 흥분했다.
광주시민들의 보수 집권여당에 대한 지역차별 불만을 단박에 체감한 순간이었다.
◆야당 텃밭에 천정배發 ‘야권 재편론’ 호불호 갈려
광주는 전통적인 ‘야권의 정치 텃밭’이다. 바꿔 말하면 여당에게 정치 불모지다. 김대중-노무현 대통령 집권 이후 10년 가까이 한나라당·새누리당의 핍박(?)을 받았다는 광주시민들에게 새정치민주연합은 누가 뭐래도 자식 같은 여당이다. 그런데 이번 4·29 재보선에서 이들은 예상치 못했던 ‘선택의 갈림길’에 놓이게 됐다.
야당을 탈당한 천정배 전 법무부 장관이 무소속 후보로 출마, 야당 텃밭이라며 안주해온 호남 정치인들을 물갈이하고 야권을 재편하겠다고 나섰기 때문이다.
당내 경선을 거쳐 새정치연합 공천장을 받게 된 조영택 후보는 당황스러운 상황에 처했다. 천 후보의 출마로 이전 같으면 ‘경선 승리(공천)=선거 당선’이란 공식이 깨질 위기에 봉착했기 때문이다.
실제 천 후보는 출마선언 이후 줄곧 지지율 여론조사에서 1위를 기록하고 있다. 여론조사기관 ‘리서치뷰’가 재보선 후보등록 직후인 지난 11~12일 광주 서구을 거주 만 19세 이상 유권자 500명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에서 천 후보의 지지율은 41.7%를 기록했다.
이는 25.8%에 그친 새정치연합 조영택 후보를 오차범위를 벗어난 15.9%포인트나 앞서는 것이다. 천, 조 후보에 이어 새정치연합 정승 후보 15.8%, 정의당 강은미 후보 8.1%, 무소속 조남일 후보 6.9% 순으로 조사됐다.
반면 정당지지도에서는 △새정치연합 46.5% △새누리당 14.5% △정의당 8.1% △타 정당 5.8% △무당층 25.2%로 집계됐다.
이 여론조사는 유선전화조사(RDD)에 의한 자동응답전화 조사방식으로 실시됐고 응답률 1.72%, 신뢰수준 95%에 표본오차는 ±4.4%P다.
이번 여론조사에서 보듯, 광주 서구을 지역민들은 사람은 무소속 천정배 후보를 선호하면서도 제1야당에 대한 애정이 큰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와 동시에 천 후보가 새정치연합을 탈당하고 지난 광주 광산을 재보선에 이어 다시 이 지역에 출마해, 사실상 야권 분열을 일으킨 것을 껄끄러워하는 이들도 적잖았다.
이날 풍금사거리에서 만난 조금녀(66·여)씨는 “천정배, 사람은 엄청 똑똑하다는 알제. 천재로 소문났자네. 근데 좀 거시기 해. 왜 무소속으로 나와 가지고 그렇게 분열을 일으키나 몰러? 암만 생각해도 야권 분열은 아니랑께. 2번 찍던 사람들이 쉽게 4번 안찍는당께”라며 손사래를 쳤다.
반면 그간 안이했던 새정치연합에 경종을 울려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었다. 광주은행 마재지점 앞에서 만난 최진영(45·남)씨는 “솔직히 말혀갔고 새정치연합 너무 무능하당께. 안철수랑 합당해갔고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잖여. 세월호만 해도 얼렁뚱땅 합의해줘서 뭐 된게 있능가? 속 터져부러. 천정배 같은 연륜 있는 사람 나서면 (새정치연합도) 정신 차릴까 싶제잉”라며 천 후보 지지 의사를 밝혔다.
◆多野 구도 속 一與, 어부지리 덕 볼까
천정배 후보의 우세 분위기 속에서도 조영택 새정치연합 후보는 “광주시민들은 제1야당을 선택할 것”이란 믿음을 갖고 있었다. 조 후보는 이날 아주경제와의 인터뷰에서 “야당 재편론, 야당 심판론에 대해 과연 얼마나 많은 광주 서구민들이 공감하실 지 의문”이라면서 “정권교체라는 꿈과 희망을 위해서라도 제1야당 후보에게 표를 주실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새정치연합도 천 후보에게 이 지역을 빼앗길 경우 ‘호남발 신당론’이 급물살을 타며 야권 재편 본격화와 지도부의 리더십에 직격탄을 맞게 된다는 위기감이 크다. 이에 문재인 대표 등 지도부가 수차례 광주를 찾아 제1야당에 힘을 실어달라고 호소함은 물론 광주형 일자리 창출 등 정책적 지원도 아끼지 않고 있다.
풍암호수공원 앞에서 만난 권순표(53·남)씨는 “무소속은 사실 좀 거시기 혀. 나중에 또 당을 어떻게 바꿀지도 모르고. 이상하게 투표소 커튼만 열고 들어가면 2번만 눈에 들어와부러. 희한하당께. 나도 모르게 손이 그렇게 (2번을 찍게) 되부러”라며 새정치연합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천 후보와 조 후보의 실질적 양강 구도 속에서 야권에선 정의당 강은미 후보와 옛 통합진보당 측 인사인 조남일 후보 등도 출사표를 던진 상태다. 이를 두고 막판 야권후보 단일화가 이뤄질 지도 주목되는 대목이다.
그러나 원내진출 야당인 정의당 소속 강은미 후보는 이미 천 후보와의 단일화는 없으며 선거 완주를 선언한 바 있다. 강 후보는 이날 아주경제와의 인터뷰에서도 “무소속이 과연 무슨 일을 할 수 있을지, 제1야당이 그간 무엇을 잘 못 했는지 광주 서구민들이 심판해주실 것”이라며 “이제는 신뢰할 수 있는 제3의 정치세력, 정의당을 선택하실 때”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간 시의원과 구의원으로 일한 진짜 지역일꾼으로서 민심의 대변자 역할을 충실히 할 것”이라고 지지를 호소했다.
야권이 이처럼 분열 구도를 보이면서 정치 불모지인 광주를 향한 새누리당의 구애는 한층 적극적이다. 식약청장을 그만 두고 출마한 정승 후보를 ‘제2의 이정현’으로 만들어달라고 호소하는 동시에 김무성 대표 등이 연일 광주를 찾아 집권여당의 전폭적인 예산 지원을 공언하고 있는 것이다.
이날도 광주시청에서 현장 최고위원회의를 주재한 김 대표는 “새누리당이 그동안 광주를 열심히 도우려 했지만 지역 국회의원이 1명도 없어서 어려움이 많았다”며 “광주 시민들이 정승 후보를 뽑아주신다면 정말 두 팔 걷고 화끈하게 밀어드리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김 대표는 지난 7.30 재보선에서 전남 순천시·곡성군에서 당선된 이정현 최고위원을 들어 “순천시·곡성군에 ‘예산 폭탄’이 최고위원이 있다면 광주 서구을에는 ‘예산 불독’ 정 후보가 있다”며 “정 후보가 당선되면 지명직 최고위원 임명은 물론이고 지역 발전을 이룰 수 있도록 적극 뒷받침하겠다”고 약속했다.
정승 후보도 이 자리에서 “이번 보궐선거는 딱 1년짜리 국회의원을 뽑는 것”이라며 “집권여당 지도부가 전폭 지원한다고 약속하셨다. 남은 1년간 광주 서구의 발전을 위해 여러 현안을 실제로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을 뽑아서 마음껏 써 봐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그러나 광주시민들의 여당 후보에 대한 비호감은 뿌리 깊어 보였다. 상무역으로 향하는 길에 만난 택시기사 조모(58·남)씨는 “사실 누가 되든 관심없당께. 먹고 살기 바쁘고, 하루 벌어 입에 풀칠하기도 힘든데 아무나 되부러”라며 정치 무관심을 보이면서도 “그래도 새누리당은 안되제. 그건 진짜 거시기 혀. 그럴라믄 차라리 투표 안하고 만당께”라고 잘라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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