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10월 서울에서 세계거래소연맹(WFE) 총회가 열렸다. 거의 모든 나라에 증권거래소가 있지만 WFE의 정식 멤버는 64개 거래소에 불과하다.
WFE의 정회원이 되기 위해서는 시장과 참여자를 규제하고 투자자의 신뢰를 얻어야 하기 때문이다. 정보기술(IT)의 발달에 힘입어 거래를 매칭시키는 것은 쉬워졌지만 신뢰받는 거래소가 되기 위해서는 다른 요건이 더 필요하다는 의미가 됐다.
증권시장이 처음부터 신뢰를 받았던 것은 아니다. 미국 최초의 증권거래소인 필라델피아거래소는 신뢰를 잃고 그 지위를 뉴욕거래소에 넘겨주고 말았다.
윌리엄 듀어의 사촌 동서이자 재무장관인 알렉산더 해밀턴은 작전을 적발해 듀어를 감옥에 보내는 한편 대규모 안정화 정책을 통해 증시의 위기를 극복했다. 그러나 한번 잃은 신뢰를 다시 회복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필라델피아를 대신할 새로운 시장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해밀턴은 증권업자들을 부추겨 뉴욕을 새로운 장소로 정하고 21명의 증권업자가 서명한 버튼우드협약을 체결해 뉴욕거래소의 출발을 다졌다. 1817년 공식 출범한 뉴욕거래소는 필라델피아거래소를 완전히 제치고 월스트리트의 얼굴이 됐고 전 세계 자본시장을 대표하는 거래소로 성장한다.
그러나 거래 장소를 뉴욕으로 옮기는 것만으로 신뢰가 회복되지 않았던 것은 당연하다. 뉴욕거래소의 성장 과정에는 해밀턴 등 연방파와 토마스 제퍼슨 등의 공화파 사이의 알력과 암투가 항상 뒤따랐다. 특히 나중에 부통령까지 지낸 공화파의 애런 버와 해밀턴은 극단적으로 대립했고 권총 결투까지 벌이게 된다.
애런 버는 금융통인 해밀턴을 견제하기 위해서 맨하탄상수도회사를 설립했지만 실제 목적은 은행을 만드는 것이었다. 애런 버가 작전을 통해 상당한 돈을 챙겼음은 물론이다. 이후 뉴욕에 수돗물을 공급하던 맨하탄상수도회사는 10여 차례의 합병과 인수를 통해 글로벌은행으로 발전했는데 현재의 JP모건체이스다.
오늘 날의 뉴욕거래소가 가진 명성과 신뢰는 대공황 직후 미국에 증권거래위원회(SEC)가 설립되고 연방증권법이 만들어지면서 시작됐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초대 증권위원장에 케네디 대통령의 아버지인 조셉 케네디를 임명했다. 한때 유명한 작전꾼이었지만 조셉 케네디는 재무제표 정기공시를 의무화하고, 주가조작 등 불공정거래를 전면금지해 증시 건전화의 기틀을 잡았다.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왜 그런 인물을 증권위원장에 임명했느냐고 묻자 "작전을 제일 잘 알기 때문"이라고 답했다고 전해진다.
최고의 신뢰를 바탕으로 전 세계 거래소의 모범이 됐던 뉴욕거래소는 2008년을 기점으로 거래량이 반토막 나면서 그 지위를 잃어가고 있다. 공교롭게도 시장과 참여자에 대한 규제 책임 없이 완전 전산화된 새로운 대체증권시장(ATS)이 확대되고 새로운 규제기관인 금융산업규제기구(FINRA)에 주요 기능을 순차적으로 넘겨주던 시기와 거의 일치한다. 현재 뉴욕거래소는 연방증권법이 부여했지만 FINRA에 넘겨주었던 시장 감시 기능을 되찾으려고 하고 있다.
투자자의 신뢰를 얻기 위한 거래소의 역할은 나라마다 차이가 있지만 공정한 매매를 보장해주는 거래방법, 시장과 기업의 정보를 투명하게 전달하는 공시체계를 기본으로 갖추어야 한다. 여기에 추가로 빠질 수 없는 것이 불공정거래 적발시스템이다.
시장구조의 허점을 이용한 주가조작과 투자자가 모르는 미공개정보를 이용하는 내부자거래는 시장의 신뢰를 떨어뜨려 시장실패로 이어지게 한다. 언론과 인터넷을 교묘히 악용해 허위사실을 유포하는 부정거래는 투자자를 기망해 증권시장에 대한 불신을 초래한다.
증권시장의 신뢰는 거래제도와 더불어 정보의 전달과 불공정거래 규제가 함께 어우러져야만 얻어질 수 있다. 진정한 의미의 시장 활성화와 투자자보호도 그제야 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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