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경제 박상훈 기자 =『"이번에 전투정보과에 배속된 신임 소위들입니다. 신고를 받으십시오." 작전정보실장이란 타이틀을 가진 사내는 검은색 양복을 입고 있었다. 검은 옷 탓이었을까. 참 키가 조그맣고 얼굴이 새카만 첫인상이었다. 그는 우리에게 계면쩍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 "나 박정희요. 근데 난 그런 신고 받을 사람이 못 돼. 거기들 앉게."』
올해 구순(九旬)을 맞은 한 남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을 처음 만났을 때를 이렇게 회상한다. 1961년 5·16을 시작으로 2004년 정계에서 은퇴할 때까지 43년간 한국 정치의 중심에서 초대 중앙정보부장, 9선 국회의원, 두 차례의 국무총리 역임, 4개 정당 총재라는 전무후무한 경력을 가진 인물 김종필이다.
그는 최근 <김종필 증언록>(전 2권·와이즈베리 펴냄)을 내놓고 장도영 육군참모총장 체포 경위, '김일성의 밀사냐 간첩이냐'로 논란을 일으켰던 황태성 사건, 독도 폭파론과 한일 밀약설, 김대중 납치 사건에 얽힌 오해와 진실, 이승만 전 대통령의 환국 추진, 차지철 비서실장 발탁에 얽힌 뒷이야기, 박정희 기념관 건립 배경 등 지금까지 현대사의 비록에 묻혀 있던 사건의 진실들을 새롭게 공개했다. 이 책은 2015년 중앙일보에 연재된 '김종필 증언록-소이부답(笑而不答)'의 내용을 엮은 것이다.
책에는 경제인들도 등장한다. 『삼성 이병철 회장이 총리실로 찾아와 "새로운 일을 시작하려고 장소를 찾아봤더니 경기도 용인 쪽이 제일 좋은데, 거기에 섞여 있는 국유지를 사지 못해 골치가 아픕니다"라고 하소연했다. 그가 "산림청이 땅을 나한테 좀 팔도록 해주시오"라고 부탁하기에 내가 산림청장을 만났더니 땅을 절대 팔 수 없다고 난색을 표했다. 산림녹화가 국정의 주요 목표였던 시절이다. 나는 이 회장에게 "정부 땅의 두 배쯤 되는 땅을 사서 주고 용인 땅과 교환하는 게 어떻겠습니까"라고 제안했다. 그는 바로 "그거 좋습니다"라며 반겼다. 그 자리에 지금은 '에버랜드'로 이름이 바뀐 용인 자연농원이 들어섰다.』
출판사 와이즈베리는 "자칫 포장과 미화로 흐를 수 있는 회고록보다 현대사의 물결 속에서 JP 자신이 직접 보고 듣고 느낀 '사실'만을 증언하고 싶었기에 '증언록'이라는 이름을 택했다"고 책 제목 선정 배경을 밝혔다.
이 책이 김 전 총리의 소망대로 역사의 충실한 증언인지, 과거에 대한 변명과 미화 혹은 진실의 오도인지를 판단하는 것은 온전히 독자의 몫이자 역사의 숙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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