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경제 채명석 기자 = 목당(牧堂) 이활(李活)은 얼마 동안의 신접살이를 하고는 아들 병린(秉麟)이 살고 있는 약수동으로 집을 구해 이사를 하고 부친 석와(石窩) 이인석(李璘錫)을 다시 모셨다. 9월 8일로서 석와는 74회 생일을 맞았으나 벌써 3개월 소화기 장애로 병상에 누워 있어 집안에서는 생일잔치를 차릴 계제가 못 되었다. 6·25로 사랑하던 아들 홍(泓)을 잃은 데다가 상배(喪配, 상처(喪妻)를 점잖게 일컫는 말)가지 하여 마음의 상처를 입은 뒤로 기운을 잃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목당 형제들은 모두 체구가 출중한데다가 대범한 성격을 지니고 있는데 이것은 석와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다. 석와는 대구폭동사건을 겪고 나서도 뒷날 그 일을 한 번도 입 밖에 낸 일이 없었고, 6·25로 아들을 잃고도 그것을 말하는 일이 없었다.
세간에는 자식들에게 돈의 귀함을 가르치기 위해 삼복 땡볕에 동전을 마당에 뿌려 놓고 아들들에게 줍게 했다고 그럴싸하게 꾸민 말도 돌았지만 그것은 잘못 전해 오는 구전(口傳)이어서, 석와는 돈에 대해서 집착을 보이지 않았으며 그런 야한 행동을 할 석와가 아니었다. 그만큼 활달한 기상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그는 자손들의 교육엔 남달리 열성을 보여 재산을 아까워하지 않았다. 즉 그가 집념을 보인 것이 있었다면 자손들에 대한 교육이어서 큰 그릇의 인물을 배출하도록 뒷바라지를 다한 것이다. 그는 행동으로써 후손들에게 모범을 보일 뿐 유별나게 가훈(家訓)이나 좌우명(座右銘)을 갖지는 않았으며 교육에 성공하여 오늘의 명문가(名門家)를 만들었다.
그에게 취미가 있었다면 정원을 가꾸는 일이어서 고향 송호정(松湖亭)을 그는 10년이나 손수 가꾸었다. 정원사를 일본 나카사키(長崎)에서 불러다가 자기 구상대로 설계시키고 정원수도 손수 가꾸었다. 서울로 올라와 사직동 집을 마련했을 때도 정원을 가꾸는 데 남의 손을 빌지 않았다. 약수동 집은 송호정 집이나 사직동 집에 비할 정도가 못 되었으나 거기서도 그는 여전히 한 포기의 정원수를 가꾸는 데도 정성을 다하고 있었다. 특히 서울에 올라와서는 벗할 친구도 없고 증손자들 자라는 것을 보는 것이 유일한 즐거움이었다. 이런 가운데 한서(漢書)를 뒤적이고 붓글씨를 즐기면서 소일하는 그런 고독한 나날이었다.
목당은 외아들 병린 하나뿐이었지만 그 밑에 3남 1녀가 있었고, 홍은 4남 6녀, 담(潭)은 4남 1녀, 호(澔)는 5남 1녀를 두어 손자, 손녀만 해도 14남 8녀에다가 증손이 3남 1녀로 대가족을 거느리고 있었다. 석와는 3대를 독자(獨子)로 내려올 정도로 자손이 귀했던 집안이었는데 석와대에 와서 4남을 두어 손(孫)이 이렇게 번창한 것이다.
근아들 활(活, 목당(牧堂))은 고려대학교 재단 주무이사(主務理事)이며 둘째 홍은 6·25 때 잃었지만 농림부차관까지 올랐고, 담은 실업가로 활약하고 있으며 막내인 호는 현직 법무장관이었다. 뿐만 아니라 손자들이 또한 하나같이 출중하여 모두 명문학교들에세 수재로 이름을 떨치고 있었다.
석와는 자식들과 손자들을 대할 때마다 흐믓했다. 다만 둘째 홍이 없는 것이 쓸쓸할 뿐. 형제들 가운데서도 가장 정이 많고 자상했던 홍이었는데 생사를 모르는 것이다. 석와의 생애에 상처를 준 것이 있었다면 송호정의 소실과 홍의 피랍(被拉)이었다. 거침없는 생애를 활달하고 출중한 자손을 두어 여한이 없는 그였으며 검은 그림자라고는 끼여들 여지가 없었지만, 늙음은 어찌할 수 없었다.
4개월 남짓의 병상 생활에 기력이 뚝 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주치의(主治醫)인 고영순(高永珣) 박사가 왕진을 했지만 노쇠에서 오는 소화기능 마비는 어쩔 수 없었다.
석와가 탈진으로 천명을 다한 것이 5월 29일이었다. 며칠 전부터 집안사람들은 모여 들었고, 목당 형제들은 아버지의 임종을 지켜드림으로써 한을 남기지 않았다.
목당은 피난결에 그동안 망우리에 모시고 있던 어머니의 이장(移葬)을 위해 공주 출신 조 지관(趙 地管)을 앞세워 산을 보고 다녔는데 수원 반월산에서 명소를 찾아 이미 자리를 잡아둔 바 있었다.
석와의 장례는 5일장으로 치루어졌는데, 격식에 어긋남이 없었다. 영천 이부자(李富者)로 이름을 떨치고 명문(名門)으로 뿌리 내리게 한 석와는 숨은 큰 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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