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의미에서 영화 ‘싱글라이더’(감독 이주영·제작 ㈜퍼펙트스톰필름·배급 워너브러더스 코리아㈜)는 이병헌의 섬세하고 세밀한 호흡, 움직임, 시선을 마음껏 즐길 수 있는 작품이다. 그의 미세한 떨림 하나하나에 영향을 받고, 변모되며 많은 의미를 품게 되니 말이다.
증권회사 지점장으로서 안정된 삶을 살아가던 가장이 부실 채권사건 이후 가족을 찾아 호주로 사라지면서 충격적인 진실이 밝혀지는 내용의 ‘싱글라이더’에서 이병헌은 모든 것을 잃고 사라진 남자 재훈을 연기했다.
“처음 ‘싱글라이더’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 번뜩 ‘번지점프를 하다’가 떠오르더라고요. 완전히 다른 작품인데도 그 당시의 감성이 떠올랐어요. 그 정도 판타지에, 그 정도 감성을 담은 작품…. 여러 가지를 느끼게 됐죠. 제가 장르를 편식하지 않는데 이 작품을 하면서 다시금 느꼈어요. ‘아, 내가 이런 종류의 영화를 좋아했었지’하고요. 디테일한 감성을 잡고, 따라가고, 표현하는 기쁨이 있는 작품이었어요.”
최근 영화계에 범죄·액션·스릴러 등 대작 영화들이 유행하며 자연스럽게 감성 영화들은 설 곳을 잃게 됐다. 배우들도 마찬가지다. 홀로 이야기를 끌어가며 섬세한 심리로 관객들을 설득하기보다 멀티캐스트로 자신의 맡은 바를 충실히 이행하며 영화의 리듬감을 살리는 것에 주력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작품에 갈증이 심했던 것 같아요. 또 우리 영화는 대사가 유난히 없잖아요? ‘번지점프를 하다’보다 더 없는 것 같아요. 그렇기 때문에 제 감정이 모니터에 담겼을 때 왜곡되지 않도록 더 애를 쓸 수밖에 없었죠. 대사가 없이 어떤 감정을 온전히 전하려면 더 세심히 신경 쓰지 않으면 안 되거든요. 그런 걸 온전히 표현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찾아가는 재미가 있었죠.”
배우로서의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었던 작품. 그의 말처럼 영화 ‘싱글라이더’는 섬세한 심리의 결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그의 말처럼 재훈은 직접적인 말을 전달하기보다 아내 수진의 곁을 맴돌며 여운을 남기곤 한다. 이토록 정적인 인물을 표현하는 것이 이병헌에게는 어려운 숙제였을 터였다.
“여러 감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나 고민하기보다는 그 인물이 되려고 노력해요. 그의 기분을 가지려고 하면 어떤 기운이 느껴지거든요. 그 기운으로 주인공의 감정을 전달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궁금해졌다. 평소 촬영현장의 분위기 메이커로 꼽히는 이병헌이지만 이처럼 정적인 연기를 할 때도 카메라 안팎의 모습에 구분을 둘까?
“기본적인 감정은 베이스로 깔고 있죠. 농담도 하지만 그런 기본적인 감정이 남아 있어야 촬영장에 걸맞은 감성으로 젖어 들 수 있잖아요. 예컨대 ‘악마를 보았다’처럼 굉장히 우울하고 밑바닥의 기분을 가지고 있는 작품이나, ‘싱글라이더’처럼 가슴이 뚫린 것 같은 감정을 가질 땐 그런 감성을 유지해야 해요. 기본적으로 감성을 붙잡고 가는 거죠.”
모든 것을 잃을 남자. 이병헌은 가슴이 뚫린 듯 공허하고 적막한 감정에 사로잡힌 재훈을 베이스로 자신만의 ‘호흡법’을 만들어냈다. 역할에 몰두하고 매료되는 것은 점차적으로 이뤄졌다.
“역할에 몰두하다 보면 대본에 없더라도 자연스럽게 대사가 나올 때가 있어요. 아들이 아파서 응급실에 실려 가는 장면이 있어요. 그때 늘 주변에서 맴돌기만 하던 재훈이 아들의 손을 잡아주는데 대사가 ‘진우, 괜찮아?’였어요. 그런데 저도 모르게 ‘아들, 괜찮아?’라는 말이 튀어나오더라고요. 제가 했지만 더 뭉클한 감정이 들었어요. 생각했던 감정보다 더 극대화되더라고요.”
이 같은 감정은 이병헌이 아들을 둔 아버지이기 때문이 아닐까? 그는 “제게도 아들이 있기 때문에 더욱 쉽게 역할에 몰입할 수 있었다”고 털어놨다. 제대로 된 부성애 연기는 처음이지만 실제 아버지이기 때문에 더 공감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제 아들 이름이 준후인데 감독님께서 일부러 극 중 아들의 이름도 비슷하게 지어주신 것 같아요. 감정을 올리기가 좋았죠. 진우, 준후…. 비슷하지 않나요?”
잔잔히 드라마를 쌓아나가던 ‘싱글라이더’는 말미, 생각지도 못한 히든카드를 꺼내 든다. 바로 재훈의 비밀과 관련된 충격적 진실이다. 재훈의 비밀은 영화의 핵심 키워드라고 봐도 무방한데, 이에 대한 해석들이 분분했다. “재훈이 이 비밀을 알고 있었느냐, 몰랐느냐”는 것이었다.
“이걸로 감독님과 한참을 옥신각신했어요. 한 달간 촬영을 했는데 싸우기는 두 달을 싸웠죠. 하하하. 전 당연히 ‘모르고 있다’에 한 표를 던졌고, 감독님은 반대였어요. 그래서 서로 이견을 조율하느라 오랜 시간이 걸렸죠. ‘만약 재훈이 비밀을 알고 있다면 이런 소소한 감정을 계속 느낄 수 있을까요? 질투, 분노, 놀람 등 여러 가지 감정을요. 그러다가 문득, 어느 순간 깨닫게 되는 것 아닐까요?’ 감독님께 말씀드렸더니 ‘그럴 수도 있겠네요’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결국 ‘시점을 명확하게 가자’고 결론을 내렸어요.”
영화가 공개된 뒤 관객들 사이에서 의견이 엇갈렸다. 재훈의 비밀을 알게 된 시점과 해석에 대해 여러 가지 토론이 가능하다는 점이, ‘싱글라이더’의 재미이기도 했다.
“다들 어떤 부분에서 눈치채셨을까요? 관계자·기자들을 만날 때마다 물어보곤 하는데요. 정말 신기하게 다 다르더라고요. 그런 점들이 재미있기도 하고 모두의 해석이 달라서 더 흥미롭기도 해요.”
내려갈 때 보았네 / 올라갈 때 보지 못한 / 그 꽃.
영화 ‘싱글라이더’ 그리고 재훈은 고은 시인의 시 ‘순간의 꽃’으로 대변된다. 이에 이병헌에게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그 꽃”을, 그 메시지에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물었다.
“이 영화의 메시지는 분명 제게 어떤 영향을 줬어요. 문득문득 살면서 뒤를 돌아보게 되더라고요. ‘내가 찾을 수 있는 행복이 있는데, 너무 앞만 보고 달리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 삶, 가족들에 대해 깊게 고민하게 되면서도 아이러니하게 ‘매그니피센트7’ 찍는다고 미국에, ‘마스터’로 필리핀에, ‘싱글라이더’ 때문에 호주에 있느라 가족들과 오래 시간을 못 보냈어요. 정말 아이러니하죠.”
분명 이병헌은 쉴 새 없이 달려왔다. 다양한 작품에서 활약하고, 다양한 캐릭터로 숨 쉬어온 그에게 이번 영화 ‘싱글라이더’의 자평을 부탁했다.
“분명 영화를 보고 ‘내 취향이 아니다’라고 하시는 분들도 계실 거예요. 이번 영화는 쉽게 말해 흥행 영화로는 보기 힘들어요. 하지만 ‘달콤한 인생’이 그랬듯, 입소문을 타고 오래도록 관객들의 마음에 남을 작품인 것 같아요. 배우에게는 흥행도 좋지만 그런 작품들이 소중하거든요. 큰 흥행을 이루지 못하더라도 좋은 영화로 기억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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