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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명사 문화 여행]명사가 털어놓는 하동談 남해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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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남해 글·사진=기수정 기자
입력 2017-11-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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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동 최참판댁 '토지' 박경리 이야기

  • 남해 독일마을 파독 간호사 이야기

지역의 아름다운 풍광, 그리고 문화를 아우르는 명품 관광 콘텐츠가 있다. '사람'이다. 

그저 물 맑고 공기 좋은 곳, 천혜의 자연만을 감상하기 위해 여행을 계획하는 시대는 지났다. 여행 목적지의 수려한 풍광, 역사와 문화는 사람의 입을 통해 더욱 빛이 난다.

특히 지역 명사(名士)가 전하는 지역의 역사 문화, 그들의 인생담은 듣는 이의 가슴을 울린다. 더 나아가 지역은 물론 국가의 품격까지 높인다.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는 추세에 발맞춰 '지역 명사와 함께하는 문화여행' 상품을 개발·운영 중이다. 지역의 역사와 생생한 삶을 함께한 명사를 이야기꾼으로 발굴·육성해 이들의 '인생담'과 '지역 고유의 문화관광 콘텐츠'를 접목한 고품격 여행상품을 만들겠다는 것이 취지다.

지역 명사(名士)와의 만남으로 대한민국 구석구석의 숨겨진 매력을 재발견할 수 있는 좋은 발판이 돼 준다. 이들의 애잔한 삶의 이야기, 삶의 밑거름이 되는 생생한 지역의 이야기를 들으러 함께 떠나 보자. 

◆최영욱 시인이 들려주는 소설 토지, 그리고 박경리 선생
 

하동 평사리 문학관을 지키고 있는 최영욱 시인[사진=기수정 기자]


박경리 선생이 1969년 6월부터 집필을 시작, 26년만인 1994년 5부로 완성한 대하소설 <토지>를 모르는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드라마와 영화로도 각색됐던 만큼 내용 또한 머릿속에 어렴풋이 그려진다. 하지만 장장 16권에 걸친, 이 긴 소설을 끝까지 읽은 이는 얼마나 될까.

설사 끝까지 읽었다 하더라도 경상남도 하동군 평사리(平沙里)와 간도의 용정(龍井), 그리고 진주와 서울 등 광활한 지역을 무대로 펼쳐지는 한 집안의 몰락과 재기 과정을 머릿속에 완벽하게 그릴 수 있는 이는 또 몇이나 될까.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 경험하는 소설의 내용도 재밌지만 명사의 입을 통해 듣는 토지의 이야기는 또 다른 즐거움을 선사한다.

박경리 선생을 8년간 어머니처럼 모시며 지낸 최영욱 시인은 토지의 줄거리, 이에 얽힌 숨은 이야기를 맛깔나게 전한다.
 

박경리 작가의 대하소설 <토지> 속 배경이 되는 최참판댁을 하동에서 만날 수 있다. [사진=기수정 기자]

하동 토박이인 최영욱 시인은 "박경리 선생님은 엄동설한에 끼니 동냥을 하던 젊은 아낙과 어린 아들이 먹을 것을 구하지 못해 굶어 죽어가면서 '우리는 지금 먹을 것이 없어서 비록 굶어 죽지만 너희 집 곳간에는 양식이 넘쳐나도 먹을 이가 없을 것'이라는 이른바 절손의 저주를 퍼부었다는 얘기를 듣고 소설 '토지를 쓰게 됐다고 한다."고 전했다.

그는 "이후 소설 속 배경을 고민하던 선생님은 하동 악양면 평사리의 넓은 들판을 보고 무릎을 탁 쳤다고 했다."고도 덧붙였다. 
 

최참판댁 내부를 둘러보고 있는 여행객[사진=기수정 기자]

만석지기에 어울리는 너른 땅83만평(약 274만㎡)의 평야가 있고 섬진강과 지리산을 끼고 있었으며 진주 출신인 박경리 선생이 경상도 사투리를 제대로 활용할 수 있는 공간이 바로 이곳 평사리였던 덕이다.

소설 속 최참판댁도 이곳에 그대로 재현됐다.

솟을대문 좌우로 행랑채가 있는 최참판댁 앞마당에 서면 악양 들판이 한눈에 들어오고 저 멀리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흐르는 섬진강이 햇살에 반작인다.

섬진강이 하얀 모래톱 사이에 파란 곡선을 그리며 반짝인다.

소설을 읽으며 머릿속에 그렸던 최참판댁 이미지와 상당히 흡사하다. 실제로 방문객은 “최참판댁은 어디 최씨냐? 이 집에 지금도 후손들이 살고 있느냐?”는 질문을 최영욱 시인에게 자주 하곤 한다고.
 

소설 토지 속 배경이 되는 최참판댁 별당 전경[사진=기수정 기자]


이야기를 들으며 최참판댁을 둘러보니 그 옛날 읽었던(드라마도 즐겨봤었다.) 토지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최참판댁에는 남자 종들이 묵는 행랑채, 아버지와 아들이 기거하는 사랑채,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있는 안채, 딸이 신부수업을 위해 묵는 별당이 있었다.

이대로라면 최치수의 부인은 안채를 써야 한다. 헌데 어찌하여 별당에 머물렀고 별당아씨라고 불렸을까. 바로 별당아씨는 최치수의 첫 번째 부인이 사망한 후에 재가한 두 번째 부인이었던 까닭이다.

‘아, 그렇구나.’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잊었던 소설 속 내용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고 몰랐던 내용에 대한 깨달음을 얻기도 했다.

최참판댁 곳곳을 둘러보는 내내 최 시인의 잔잔한 목소리, 익어가는 가을과 한옥의 고즈넉함이 어우러졌다.

최참판댁을 빠져나온 최 시인은 평사리문학관으로 향했다.

“평사리 문학관을 만들어내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어요. 무엇보다 박경리 선생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지요.”

최 시인은 포기하지 않았다.

"'토지를 기리는 문학관을 설립하겠다'며 박경리 선생을 찾아가 넙죽 절을 올렸지만 '토지를 이용해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며 단호하게 거절한 박경리 선생을 삼고초려 끝에 설득할 수 있었어요."라고 회상했다.

박경리 선생이 문학관 건립을 허락하는 데엔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의 저자 박완서 선생의 힘이 컸단다.

문학관은 기존 전통농업문화전시관을 개조해 만들었다.

박경리 선생의 개인사는 물론 살아생전 불태웠던 창작열, 초상화, 사진, 영상물이 고루 전시돼 있다.

문학관에는 박경리 선생의 자제인 김영주 토지문화재단 이사장이 무상 대여한 유물도 만날 수 있다.

최 시인은 토지와 박경리 작가를 사랑하는 독자들에게 이곳 평산리 문학관에서 열리는 '문학제'와 '달빛 낭송회'를 방문해 볼 것을 권했다.

문학제와 달빛 낭송회는 매년 10월 국내 유명 문인 및 역대 수상자 참여하는 가운데 문학·경연·공연·체험·전시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펼쳐진다.

내년 5월5일엔 박경리 선생 10주기를 맞아 '10주기 추모문학제'도 이곳에서 열린다.

젊은 시절 박경리 선생의 <문학을 하고 싶은 젊은이들에게>라는 산문집을 읽고 문학도의 길을 걷게 됐다는 최영욱 시인은 오늘도 박경리 선생을 향한 식지 않는 존경과 무한한 애정을 드러내며 평사리문학관을 지켜내고 있다.

◆파독 간호사 석숙자 여사···어려웠던 시절, 낯선 땅 독일에서 보낸 눈물 젖은 나날
 

독일마을 초입에는 가난했던 1960년대, 가족 부양을 위해 독일로 떠났던 젊은 광부, 그리고 간호사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사진=기수정 기자]


세계 경제순위 11위. 세계 국가 명목상 국내총생산(GDP) 1조 5297억원.

현재 우리나라가 차지하는 위치는 상당히 높지만 1960년대만 해도 우리나라는 빈곤의 나라였다.

찢어지게 가난했던 우리는 늘 배가 고팠고 끼니를 구걸했다. 전 세계에서 두 번째로 가난한 나라였다고 하니 당시 생활상이 어땠는지는 상상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비참했다.
 

석숙자 여사가 파독 간호사로 떠났던 이유와 독일에서의 힘겨웠던 나날들에 대해 담담히 전해주고 있다.[사진=기수정 기자]

당시 국민소득은 76달러(8만2770원)로 당시 태국은 220달러(23만9600원), 필리핀 170달러(18만5100원) 절반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우리나라는 1950년대 한국전쟁 이후로부터 경제는 어려웠고 다른 나라에선 한국을 회생하기 어려운 나라로 인식됐다. 가랑이가 찢어지게 가난했던 시절, 타국에 외면받던 시절 역사적으로 조선 시대부터 교류가 있었던 독일은 우리의 손을 잡아 주었다.

1883년 고종과 독일 황제 프로이센 국왕은 양국의 지속적 우호 관계를 위해 맺은 '한·독 통상 우호 항해조약'을 체결했었다.
 

남해 독일마을 전경[사진=기수정 기자]

우리는 1963년부터 1977년까지 우리는 7936명의 광부를, 1960년부터 1976년까지 1만1057명의 간호사를 각각 독일로 파견했다.

이들이 1965년부터 1975년까지 고국에 보낸 송금액은 무려 총 1억153만달러다. 외화 가득률이 100%에 해당하는 임금이라는 점과 1달러의 외화도 소중했던 당시 경제 상황에 비춰보면 이들의 땀과 눈물은 한국 근대화의 초석이 된 것이 분명했다.

경남 남해군 독일마을에서 만난 석숙자 여사도 파독 간호사 중 한 명이었다.

1973년 간호사로 독일에 간 석숙자 여사는 라이힐링앤(Leiclingen)이라는 작은 도시에 머문 최초의 동양인이기도 했다.

석숙자 여사는 지난 30년간 독일에서 살았다. 말 한마디 통하지 않는 나라에서 온갖 허드렛일을 하면서도 묵묵히 자리를 지켰다.

온갖 어려움을 견디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 파독 간호사들에게는 '코리안 엔젤'이라는 애칭도 생겼다.

석 여사는 "말이 안 통하니 시체 닦이, 중환자 수발 등 가장 힘들다는 일을 맡아 했어요. 어린 나이에 정말 하루하루를 눈물로 보냈죠."라며 그 시절을 회상했다.

그는 "당시 한국의 8급 공무원 월급이 1만5000원이었는데 파독 간호사는 그의 10배가량인 15~20만원씩을 받았다"며 "그중 생활비 3~4만원을 제외하고 모두 한국으로 보냈다"고 말했다.
 

독일 맥주와 커피, 그리고 독일 수제 소시지[사진=기수정 기자]

석 여사는 "무엇보다 독일인과 한국인을 똑같이 대우했다는 점이 가장 고맙다"면서 "독일에서 임신한 한국 간호사들은 1년을 쉬었어야 했는데 병원에서도 손해고 독일이란 나라에 도움이 되지 않았음에도 우리에게 출산비용을 모두 지원해줬다."고 전했다.

석 여사를 비롯해 독일에 파견돼 한국 경제 발전에 기여한 독일 거주 교포들은 남해 독일마을에 둥지를 틀었다.

물론 독일마을이 처음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다. 2001년 남해군이 산업역군으로 독일에 파견돼 한국의 경제 발전에 기여한 독일거주 교포들의 정착을 위해 마련한 곳이다.

석 여사는 "지금은 독일 양식의 주택과 남해의 수려한 경관이 어우러져 여유로운 느낌이 물씬 풍기는 곳이지만 독일마을이 조성되기 전에는 돌 무성이에 뱀까지 많은 황무지 중 황무지였다."며 웃어 보였다.

현재 독일마을엔 독일에서 우여곡절의 수십 년 세월을 보냈던 독일 교포 25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청춘을 다 바친 독일에서의 시간은 비록 고생스러웠지만 그 또한 이들에게는 추억이 되었다. 이에 남해에 둥지를 튼 교포들은 마을에서 다양한 독일 문화 행사를 열고 있다.

매년 10월 남해에서도 독일 민속 축제인 '옥토버페스트'가 개최되는 것도 그 이유에서다. 

교포들은 방문자들에게 독일 와인, 맥주, 소시지 등을 제공하는 것은 물론 이들이 직접 독일 생활에서 불렀던 동요, 가요 등을 전하기도 한다. 
 

최참판댁 별당 전경[사진=기수정 기자]

남해 독일마을 전경[사진=기수정 기자]

파독 간호사들이 사용했던 가운과 물품, 그리고 생활모습을 담은 사진들이 전시돼 있다.[사진=기수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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