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 = 배석규 칼럼니스트]
몽골의 고려 정복은 쿠빌라이 시대에 마무리된다. 몽골군이 오랜 대치 끝에 양양과 번성을 장악하고 여문환의 항복을 받아내면서 남송과의 전쟁에서 고비를 넘었던 것이 1273년 2월이었다. 그로부터 두 달 뒤, 몽골과 고려의 연합군이 탐라(제주)에서 마지막 항쟁하던 삼별초를 제압하면서 몽골의 고려 정벌에 마침표를 찍는다. 고려와의 전쟁은 쿠빌라이가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사진 = 몽골군 토크기]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쿠빌라이가 바다의 시대를 여는 과정에서의 전투가 됐다는 점에서는 맥이 통하는 점이 있다. 그 것은 고려의 정복이 결국 실패로 끝나기는 했지만 섬나라 일본에 대한 원정을 감행하는 출발점이 됐기 때문이다.
▶ 몽골, 형제의 의(義) 통첩
고려와 몽골의 관계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시간을 다소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1216년, 몽골군과 금나라군에게 쫓긴 거란인 9만여 명이 압록강을 넘어 한반도로 들어왔다. 살길을 찾아 한반도로 들어온 터라 거란인들은 마구잡이 약탈을 하며 고려 땅을 헤집고 다녔다. 이들은 평안도를 거쳐 경기도까지 밀고 내려오면서 묘향산에 있는 보현사(普賢寺)를 불태우는 등 방화와 약탈을 서슴지 않았다.

[사진 = 카치온 관련 고려사]

[사진 = 몽골군 출병]
▶ 협조관계로 시작된 첫 만남

[사진 = 몽골군 막사]
몽골에서 호레즘 정벌이 준비되면서 더 이상 고려에 머물러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몽골은 이 때 나중에 고려를 손에 넣겠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고려의 최씨(崔氏) 무신정권(武臣政權)은 중국 땅에서 회오리바람을 일으키고 있던 몽골의 실체를 파악하고 나중을 대비하는 방책을 세울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있었다. 그들의 관심은 오직 정권을 유지하는 데에만 있었다.
▶ 최씨 무신정권의 등장
고려는 1170년 정중부(鄭仲夫)의 난 이후 의종(毅宗)이 추방되고 명종(明宗)이 새로 들어서면서 문신귀족들이 몰락하고 무신계급이 득세하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김보당(金甫當)의 난과 조위총(趙位寵)의 난, 망이․망소이의 난, 만적(萬積)의 난 등 수많은 반란이 일어나 나라는 극도로 혼란했다.

[사진 = 최충헌 관련 고려사]
▶ 사신 저고여 피살사건 발생
몽골군이 돌아간 1219년 최충헌이 죽자 아들간의 권력투쟁 과정을 거쳐 국정 전반에 관한 모든 권한은 최우(崔堣)에게 넘어갔다. 몽골이 호레즘과 금나라 정벌에 힘을 쏟는 동안 고려는 몽골의 말발굽에 유린되는 일이 없이 비교적 평온한 시기를 보냈다. 다만 그 동안에도 몽골은 수시로 사신을 보내 공물을 요구하기도 했다. 고려는 공물을 보내지 않은 것은 물론 사신을 푸대접하기가 일쑤였다.

[사진 = 몽골의 악극]
▶ 동진의 음모로 발생한 사건

[사진 = 동진국 인근 지역]
사실여부에 관계없이 몽골은 고려가 사신을 살해한 것으로 단정 짓고 보복을 다짐했다. 일부 사학자들은 몽골이 고려 침공의 구실을 만들어 내기 위해 꾸민 일이라고 주장을 하고 있다. 하지만 몽골이 호레즘 전쟁이 마무리되지 않은 상황에서 고려 쪽으로 눈길을 돌릴 여유가 없었던 시점이었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떨어진다.
당장 전쟁에 나설 수 있는 사정도 아닌데 자신이 보낸 사신까지 죽여 가며 음모를 꾸몄을 가능성은 높지 않기 때문이다. 그 후 3년 뒤 서하 원정 중에 칭기스칸이 죽었다. 그러한 소용돌이 속에서 고려와 몽골은 7년간 국교가 단절된 채 내왕이 끊겼다. 몽골이 고려 침공에 나서면서 길고 긴 여몽전쟁이 시작된 것은 몽골의 후계자 구도가 정리돼 오고타이가 두 번째 대칸의 자리에 오르고 난 이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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