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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석규의 대몽골 시간여행-102] 긴 전쟁은 어떻게 시작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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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석규 칼럼니스트
입력 2017-12-03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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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배석규 칼럼니스트]

▶ 42년에 걸친 긴 전쟁
몽골의 고려 정복은 쿠빌라이 시대에 마무리된다. 몽골군이 오랜 대치 끝에 양양과 번성을 장악하고 여문환의 항복을 받아내면서 남송과의 전쟁에서 고비를 넘었던 것이 1273년 2월이었다. 그로부터 두 달 뒤, 몽골과 고려의 연합군이 탐라(제주)에서 마지막 항쟁하던 삼별초를 제압하면서 몽골의 고려 정벌에 마침표를 찍는다. 고려와의 전쟁은 쿠빌라이가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사진 = 몽골군 토크기]

전쟁이 시작된 것은 오고타이 시대인 1231년이었다. 무려 42년간의 전쟁이었다. 몽골이 하나의 나라를 정복하는 데 이처럼 길고 긴 세월이 걸린 경우는 고려와 남송뿐이지만 실제 전쟁을 벌인 기간은 고려 쪽이 훨씬 길었다. 그 긴 전쟁을 모두 쿠빌라이가 마무리 지었다. 남송의 접수는 쿠빌라이가 필요에 따라 심혈을 기울였던 전쟁이었지만 고려와의 전쟁은 성격에서 다소 차이가 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쿠빌라이가 바다의 시대를 여는 과정에서의 전투가 됐다는 점에서는 맥이 통하는 점이 있다. 그 것은 고려의 정복이 결국 실패로 끝나기는 했지만 섬나라 일본에 대한 원정을 감행하는 출발점이 됐기 때문이다.

▶ 몽골, 형제의 의(義) 통첩
고려와 몽골의 관계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시간을 다소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고려와 몽골의 첫 만남, 그 것은 형식상으로 서로 협력하는 모양으로 이루어졌다. 그 만남의 원초적인 발단은 역시 몽골이 동아시아 지역에서 일으킨 회오리바람의 여파였다.

1216년, 몽골군과 금나라군에게 쫓긴 거란인 9만여 명이 압록강을 넘어 한반도로 들어왔다. 살길을 찾아 한반도로 들어온 터라 거란인들은 마구잡이 약탈을 하며 고려 땅을 헤집고 다녔다. 이들은 평안도를 거쳐 경기도까지 밀고 내려오면서 묘향산에 있는 보현사(普賢寺)를 불태우는 등 방화와 약탈을 서슴지 않았다.
 

[사진 = 카치온 관련 고려사]

이에 대한 고려의 대응은 효과적이지 못했다. 거란인의 행패가 계속되던 1218년, 몽골과 당시 몽골의 영향권에 있던 포선만노의 동진(東眞)이 함께 ‘거란군을 토벌하고 고려를 구한다.’는 명분을 앞세워 각각 1만과 2만의 병력을 이끌고 고려 땅에 들어섰다. 당시 몽골의 장수 카치온(哈眞)은 고려 서북면원수부(西北面元帥府) 에 사신을 보내 군량미를 요구하면서 함께 거란을 소탕한 뒤 언급한 대로 고려와 몽골이 형제의 의를 맺을 것을 약속하는 통첩을 칭기스칸의 이름으로 전달했다.
 

[사진 = 몽골군 출병]

고려는 처음에는 주저했으나 결국 몽골과의 공동작전에 동의했다. 1219년 1월, 세 나라 연합군은 거란인의 본거지였던 강동성(江東城)을 함락시키면서 거란인들은 고려를 침입한 지 2년 반 만에 완전 손을 들고 말았다. 이 시점은 몽골의 호레즘 사절단이 오트라르성에서 이날축에게 살해되면서 호레즘 전쟁이 예고되고 있던 때였다.

▶ 협조관계로 시작된 첫 만남

[사진 = 몽골군 막사]

이처럼 고려와 몽골의 첫 만남은 나쁘지 않았다. 거란인들을 격멸시킨 뒤 몽골군은 약간 오만불손한 태도를 보이기는 했지만 약탈을 저지르지도 않았고 조공을 요구하지도 않았다. 고려와 전쟁을 치른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점이 있기는 했겠지만 다른 원정국에서는 볼 수 없었던 너그러운 자세였다. 몽골의 장수 카치온은 고려의 장수들과 형제의 맹약을 맺기도 하고 몽골 말을 아는 고려인을 대동하고 다니면서 고려의 사정을 알아보는 등 나중을 대비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얼마 후 황급히 몽골로 되돌아갔다.

몽골에서 호레즘 정벌이 준비되면서 더 이상 고려에 머물러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몽골은 이 때 나중에 고려를 손에 넣겠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고려의 최씨(崔氏) 무신정권(武臣政權)은 중국 땅에서 회오리바람을 일으키고 있던 몽골의 실체를 파악하고 나중을 대비하는 방책을 세울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있었다. 그들의 관심은 오직 정권을 유지하는 데에만 있었다.

▶ 최씨 무신정권의 등장
고려는 1170년 정중부(鄭仲夫)의 난 이후 의종(毅宗)이 추방되고 명종(明宗)이 새로 들어서면서 문신귀족들이 몰락하고 무신계급이 득세하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김보당(金甫當)의 난과 조위총(趙位寵)의 난, 망이․망소이의 난, 만적(萬積)의 난 등 수많은 반란이 일어나 나라는 극도로 혼란했다.
 

[사진 = 최충헌 관련 고려사]

이를 정리하고 최 씨 무신정권의 기반을 닦은 사람이 최충헌(崔忠獻)이다. 최충헌은 강력한 독재정치로 정권을 안정시키고 최충헌→최우→최항→최의 순으로 이어지는 최 씨 무신정권을 확립했다. 최 씨 무신정권이 성립된 이후 임금을 비롯한 황실은 허수아비나 마찬가지였고 모든 국사는 최 씨 집안이 좌지우지하는 형편이었다.

▶ 사신 저고여 피살사건 발생
몽골군이 돌아간 1219년 최충헌이 죽자 아들간의 권력투쟁 과정을 거쳐 국정 전반에 관한 모든 권한은 최우(崔堣)에게 넘어갔다. 몽골이 호레즘과 금나라 정벌에 힘을 쏟는 동안 고려는 몽골의 말발굽에 유린되는 일이 없이 비교적 평온한 시기를 보냈다. 다만 그 동안에도 몽골은 수시로 사신을 보내 공물을 요구하기도 했다. 고려는 공물을 보내지 않은 것은 물론 사신을 푸대접하기가 일쑤였다.
 

[사진 = 몽골의 악극]

몽골인 사신들의 행동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최우는 이때부터 의주(宜州)와 화주(華州) 그리고 철관(鐵關)등에 성을 쌓고 개경의 나성(羅城)을 수리하는 등 몽골과의 전쟁에 대비하기 시작했다. 1224년 저고여(著古與)를 비롯한 몽골 사절단 열 명이 고려에 왔다. 몽골의 호레즘 전쟁이 거의 마무리돼 가던 시점이었다. 몽골은 이미 한번 사신으로 왔던 저고여에게 전과는 달리 잘 대접해 보냈다. 그런데 이들이 몽골로 돌아가는 길에 압록강 근처에서 피살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 동진의 음모로 발생한 사건

[사진 = 동진국 인근 지역]

이는 동진(東眞)국의 음모에 의해 저질러진 일로 추정된다. 칭기스칸의 호레즘 원정으로 몽골이 동쪽 지역에 대해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게 되자 동진의 포선만노는 몽골과의 외교관계를 끊고 고려를 여러 차례 습격했다. 지금의 만주 요양(遼陽)에 자리를 잡고 연길 지방에서 고려 함경도에 이르는 땅을 지배했던 동진은 고려와 몽골 사이를 이간시키기 위해 고려를 침범할 때는 몽골인의 복장을 하고 들어왔다. 반대로 몽골의 사신을 살해할 때는 고려인으로 위장한 뒤 일을 저질렀다.

사실여부에 관계없이 몽골은 고려가 사신을 살해한 것으로 단정 짓고 보복을 다짐했다. 일부 사학자들은 몽골이 고려 침공의 구실을 만들어 내기 위해 꾸민 일이라고 주장을 하고 있다. 하지만 몽골이 호레즘 전쟁이 마무리되지 않은 상황에서 고려 쪽으로 눈길을 돌릴 여유가 없었던 시점이었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떨어진다.

당장 전쟁에 나설 수 있는 사정도 아닌데 자신이 보낸 사신까지 죽여 가며 음모를 꾸몄을 가능성은 높지 않기 때문이다. 그 후 3년 뒤 서하 원정 중에 칭기스칸이 죽었다. 그러한 소용돌이 속에서 고려와 몽골은 7년간 국교가 단절된 채 내왕이 끊겼다. 몽골이 고려 침공에 나서면서 길고 긴 여몽전쟁이 시작된 것은 몽골의 후계자 구도가 정리돼 오고타이가 두 번째 대칸의 자리에 오르고 난 이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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