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에 옳고 그름이란 있을 수 없다”
지난 23일 재판부가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에게 징역 4년형을 선고하면서 한 말이다. 문화계 블랙리스트로 문화예술인들을 정치적 잣대로 구분지어 지원했던 김 전 실장에 대한 법원의 판단은 준엄했다. 늙고 병들었다는 이유로 선처를 호소했지만 이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지난 한 해 동안 블랙리스트로 문화예술인들을 멍들게 했던 역사적 죄인들에 대한 단죄가 속속 진행되고 있지만 여전히 한국 문화계는 정치적 풍파에서 자유롭지 못한 듯하다. 지방 선거를 이유로 공연까지 취소해야 한다는 한 공연장의 이야기는 그래서 더 씁쓸하게 느껴진다.
정치인들의 지방 선거 욕심이야 하루 이틀 일이 아니지만, 지방 공연 일정에까지 정치 공학적 셈법이 적용되는 것은 지탄 받아 마땅한 일이다. 가뜩이나 수도권과 지방의 문화 향유 격차가 심각한 상황에서 지방 거주민들에게 한 번씩 찾아오는 공연 관람 기회까지 정치적 이유로 뺏겨버린다면 이는 ‘문화향유권’의 박탈인 셈이다.
정치적 이익을 위해 문화를 볼모로 잡는 일은 더 이상 있어선 안 된다. 문화엔 좌도 우도 없다. 문화예술인들의 순수한 예술성과 이를 즐기기 위한 관객들이 있을 뿐이다. 정치는 이런 구조가 활발하게 지속될 수 있는 토대만 만들어 주면 된다. 그 이상의 역할을 하려고 할 때 정치적 프레임에 갇히게 되는 역효과만 부를 뿐이다.
문화계 블랙리스트 가담자 처벌로 지난날의 과오를 씻기 위한 적폐청산이 이뤄지고 있지만 현실 속의 모습은 여전히 예전의 그것에 머물러 있다. 어쩌면 정권의 서슬이 시퍼렇던 1980년대의 모래시계는 아직도 그때의 시간에 멈춰져 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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