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2년 생인 이 여사는 1950년대 서울대 사범대를 졸업, 미국 스캐릿 대학에서 사회학 석사를 졸업한 엘리트 여성이었다. 이 여사의 아버지 이용기씨는 세브란스 의전을 나온 의사였다.
이 여사는 마흔이 되던 해인 1962년 5월 10일 서울에서 결혼했다. 당시 이 여사는 4년 간의 유학생활을 마치고 YWCA 총무를 맡고 있었다.
DJ는 당시를 가장 곤궁했던 때로 기억했다. 자서전에서 그는 "나는 가장 넉넉한 시절 그녀를 알았고, 가장 곤궁한 때 서울에서 결혼을 했다"고 밝혔다.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은 열흘 만에 위기를 맞았다. DJ가 반혁명을 죄목으로 중앙정보부에 연행됐던 것이다. 이후로도 DJ는 숱한 고난을 겪었고 이 여사는 그의 곁에서 힘이 됐다.
두 사람은 늘 서로를 존중했다. 늘 서로에게 높임말을 썼다. DJ가 서울 마포구 동교동으로 이사하면서 대문에 '김대중', '이희호'라고 쓴 명패를 나란히 건 것은 유명한 얘기다. DJ는 감사와 존경의 뜻으로 '커플 명패'를 달았다고 밝혔다.
D는 1963년 6대 총선에서 목포에 출마해 극적으로 당선됐다. 이후 박정희·전두환 독재정권과의 투쟁 선봉에 섰다. 선거 때마다 이 여사는 '남편이 1진이라면 나는 2진'이라면서 DJ가 일일이 챙기지 못하는 골목을 누볐다.
김 전 대통령이 1970년대 초 유신 반대 투쟁에 앞장섰을 때 '더 강력한 투쟁을 하시라'고 남편을 독려하는 등 강골의 운동가 기질을 발휘하기도 했다.
이 여사는 1976년 3·1 민주구국선언 사건으로 김 전 대통령과 함께 남산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초를 당하기도 했다. 사흘 만에 풀려난 이 여사는 다른 3·1 사건 구속자 가족들과 양심수 가족협의회를 결성해 석방 운동에 앞장섰다.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으로 DJ가 사형을 선고받았을 때는 이 여사에게도 가장 큰 시련의 시기였다. 이 여사는 머리카락이 한 움큼씩 빠질 정도로 마음고생을 했고, 지독한 관절염까지 얻었다.
그러면서도 옥중의 김 전 대통령에게 600권이 넘는 책을 보내 공부를 돕는가 하면 청와대 안가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과 독대해 남편의 석방을 요구하기도 했다.
1982년 말 미국으로 망명한 김 전 대통령과 이 여사는 미국 전역을 돌아다니며 대학과 교회 등에서 전두환 독재의 실상을 알리는 민주화 투쟁을 벌였다.
2년여 만에 귀국한 김 전 대통령 부부는 장기 연금과 도청, 감청에 시달리다가 1987년 전 전 대통령의 6·29 선언이 있고 난 뒤에야 마침내 활동의 자유를 얻게 됐다.
DJ가 대통령에 당선된 후에도 이 여사는 여성과 어린이,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와 소외 계층의 권익 신장을 위해 노력했다. 사단법인 사랑의 친구들 명예총재를 맡아 결식아동과 북한 어린이를 도왔으며, 한국여성재단을 출범하는 데도 역할을 했다. 여성부 창설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하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같은 공로를 인정받아 김 전 대통령이 노벨평화상을 받은 2000년 이 여사도 펄 벅 인터내셔널이 주는 '올해의 여성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김 전 대통령 퇴임 후 부부는 동교동 사저로 돌아왔으며, 이 여사는 2009년 8월 김 전 대통령 서거로 47년 동안 함께 했던 '동역자(同役者)'와 작별했다.
이 여사는 김 전 대통령 서거 직후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으로 선임돼 동교동계의 구심점이자 재야인사들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다.
2011년 말 김정은 전 북한 국방위원장이 사망했을 때 조문단 자격으로 1박 2일간 방북, 금수산기념궁전에서 상주인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인사를 나누기도 했다.
"우리가 함께 살아온 47년의 생애를 매일같이 떠올리고 있습니다. 나는 당신을 언제나 존경하고 사랑했습니다. 내 생이 다하는 그날까지 당신을 위해 기도하고 사랑할 것입니다. 하느님은 끝없는 사랑으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 주실 줄 믿습니다. 하느님 품에 편안히 쉬시옵소서." (김대중 자서전에 실린 이희호 여사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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