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는 무궁화 삼천리 애국가 후렴을 암송케 하여 한국에서 만주를 분리, 한국을 식민지배했다. 다시 일제는 ‘삼천만 인민 삼천만 인민’ 만주국가 가사를 반복 암송케함으로써 만주와 몽골을 분할, 만주를 괴뢰화 통치했다.
∙ 일본의 전범 기업 미쓰비시(三菱), 미쓰이(三井)... 일본은 3을 너무 좋아해! 만주괴뢰국 국가도 '삼천만', 한국의 애국가도 삼천리' 세상에 이처럼 이상한 우연의 일치가 또 있을까?
◆20세기 중국 제일 미남과 미녀의 비참한 최후
왕징웨이(汪精衛, 1883~1944년)의 본명은 왕자오밍(汪兆銘)으로 20세기 최고의 중국 미남 정치인으로 손꼽힌다. 원래 그는 중국 국민당 일원으로 중국의 국부 쑨원(孫文)과 친밀한 관계에 있었으며 장제스와는 대립하는 라이벌이었다.
중일 전쟁 발발 이후에 종일매국노로 변절하여 난징에서 1940년 3월 30일 일제 괴뢰 정권을 세웠다. 중국의 대표적인 '매국노(漢奸, 한간)'로 불린다. 왕징웨이의 괴뢰 정권은 정통성을 계승했다고 주장하기 위해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와 같이 중화민국의 국호와 국기를 사용하고 국가마저 쑨원(孫文)이 작사한 '삼민주의'를 사용했다.
1943년 이후 왕징웨이는 골수암 치료를 위해 일본에서 거주하다가 1944년 11월 10일 나고야에서 죽었다. 일본 군부대는 그의 유해를 중국으로 운송해서 단단한 콘크리트로 조성했다.
그러나 1946년 1월 21일, 장제스 국민당 위원장의 특명에 따라 왕징웨이의 묘는 다이나마이트로 폭파됐고 그의 유해는 화장돼 장강에 버려졌다. 그로부터 48년 후인 1994년 당시 장쩌민 국가주석의 특명으로 난징시 정부는 왕징웨이의 파묘터에 왕징웨이 부부의 무릎 꿇는 석상을 만들어 놓았다.
오가는 사람들마다 왕징웨이 부부의 석상에 침을 뱉어 석상이 가래침으로 덮일 정도였다. 결국 매국노 부부상은 1997년 저장성 타이저우에 위치한 명말 왜구를 물리친 명장 척계광(戚繼光, 1528년~1587년) 사당으로 이전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도 2001년 저장성 당서기 재직시 척계광 사당을 참배하며 나오는 길에 왕징웨이 석상에 가래침을 뱉었다고 한다.
2004년 11월 18일 오후 저장성 샤오싱시에서 중일전쟁 당시 항일 지하조직원에 의해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왕징웨이 무릎 꿇은 석상이 발견되었다. 역적 왕징웨이 ‘왕역정위(汪逆精衛)’가 네 자가 새겨져 있다.
왕징웨이 하나만 아니었다. 마오쩌둥 공산 정권에 비해 일본에 유화적인 장제스 국민정부조차도 왕징웨이 정권 수뇌부 8대 종일매국노 전원을 특별법정에 회부 사형선고와 동시에 사행집행했다. 그리고 일본군 전범포로 사형집행 149명, 무기징역 400여명을 단죄해 능욕당한 노대국의 자존심을 되찾았다.
그럼에도 불구화고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국민당 장제스 정부가 일본과 종일매국노들에 지나치게 유화적이었다고 비판하고 있다. 모조리 즉결 총살형에 처할 것들을 쓸데없이 재판 따위나 해서 일부만 처형하고 다수는 무기징역으로 살려줬다는 것이다.
◆만일 이 여인이 한국에서 태어났더라면
1975년 여름, 중국 최북단 헤이룽장성 싱안링(興安嶺) 산맥 기슭 산림에서 나무꾼들에 의해 여인의 시체 한 구가 발견됐다. 현지 경찰 조사 결과 시체의 주인공은 장치(张琦)였다. 30년간 혼자 깊은 산중에서 살다가 불과 며칠 전에 자연사한 것이었다. 장치는 누구이며 왜 인적 없는 깊은 산속에서 여인 혼자 30년간이나 숨어 살아야 했을까?
장치는 일제 괴뢰 만주국 제2대 총리이자 만주국 두 번째 국가(國歌) 작사자인 장징후이(张景惠, 1871~1959)의 7인의 정부(情婦) 중 가장 나이가 어렸다. 입산(?) 당시 나이는 방년 25세로 전해진다.
1945년 8월, 일본의 패망으로 장징후이와 그의 처첩들이 체포되기 직전, 장치 혼자 용케 자리를 피하여 헤이룽장 싱안링 산맥의 심심유곡까지 도피, 그곳에서 움막을 짓고 혼자 숨어 살았다.
1975년 여름 그녀의 시체가 발견됐을 때 시체 곁에는 오래된 나무상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나무상자 속에는 장징후이의 권총, 그와 함께 찍은 사진들과 주고받은 연애편지들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한국의 애국가와 만주의 애국가는 닮은 꼴
한국의 애국가 작사자 윤치호와 만주국 국가(2차) 작사자 장징후이의 생의 궤적은 '도플갱어'라 할 만큼 많이 닮았다. 둘은 각각 조선과 만주를 대표할만한 악질 매국노로서 일제의 극진한 대우를 받았다. 윤치호는 일본제국의회 귀족원 의원을, 장징후이는 만주국 제2대 총리로 10년간 재임했다. 둘 다 피지배 국민으로서는 더 이상 오를 수 없는 극상의 지위까지 오른 셈이다.
1937년 3월 장징후이는 조선을 방문, 윤치호 등 조선의 대표적 친일인사들을 만났다. 이때 둘은 '만선일가(滿鮮一家, 만주와 조선은 한 가족)'의 구호를 외치며 조선과 만주가 함께 일제에 협력하자는 데 뜻을 모았다.
1942년 3월 윤치호는 만주국 건국 10주년을 맞이하여 만주국 수도 신경(新京, 지금의 지린성 창춘)을 방문 장징후이를 예방했다. 장징후이는 그때 자신이 쓴 기념사가 수록된 '반도사화와 낙토만주(半島史話와 樂土滿洲)' 라는 일제의 식민사관이 그득한 책의 표지에 글씨를 써주었다.
◆만주괴뢰국 2대 총리 장징후이
그러나 이 둘의 말로와 사후평가는 완전히 다르다. 장징후이는 만주국 패망 직후 체포돼 푸순(撫順)전범관리수용소에 수감 1959년 11월 사망했다. 그의 사체는 소각처리됐다. 중국에서 장징후이에 대한 평가는 한국에서 윤치호의 그것과 전혀 다르다. 세세대대로 용서받을 수 없는 악질 종일매국노 한간(漢奸)으로 공인, 15억 중국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윤치호는 광복 직후인 1945년 10월 20일 이승만과 김구, 미국 군정청에게 각각 '한 노인의 명상록'이라는 제목으로 역사의 불가역적 불가항력을 역설하는 편지를 보냈다. 편지에서 그는 애국자연하는 독립운동가가 독립을 이룩한 것이 아니라 미군의 승전으로 우연히 독립을 달성한 것이라고 독립지사들을 신랄히 비난하였다.
윤치호는 그해 12월 11일 개성 자택에서 노환으로 죽었다. 그의 유해는 두 부인과 함께 선영에 합장됐다. 그의 묘소 옆에는 검은색 오석 재질의 비석이 세워져 있다. 1950년 윤치호의 장남 윤영선이 2대 농림부 장관을 지냈다. 윤치호는 오늘날에도 이른바 한국 보수우파 일각에서 선각자로 추앙받고 있다. 또한 그는 초기에는 애국지사였는데 한일합방 이후 이광수와 최남선 정도의 마일드하게 변절한 친일인사로 일반에 알려져 있다.
◆만주국 두 번째 국가
ㅇ 작사자 :장징후이(张景惠 만주괴뢰국 2대총리 )
-가사핵심: 영원히 하느님이 보우하사(永受天祐兮)
ㅇ 작곡자: 야마다 고사쿠(山田耕筰 일본인) 안익태의 절친
-곡조: 일본 창가풍
신의 빛이 우주를 비추니 강산을 속속들이 다스리네
천황의 덕의 융성함은 그 어떤 것보다 견줄수 없도다.
영원히 하느님이 보우하사 만수무강 바다를 이루리라
하늘의 과업을 해낸다면 그 휘황은 해와 달과 같으리
神光開宇宙 表裏山河壯皇猷
帝德之隆 巍巍蕩蕩莫與儔
永受天祐兮 萬壽無疆薄海謳
仰贊天業兮 輝煌日月侔
장징후이는 만주국의 두 번째 국(1942~1945)의 작사자로 알려졌다. 그러나 사실상 이름뿐이었고 만주국 일본인 관료들이 작사했다. 만주국 국가 가사가 윤치호가 작사 애국가와 많이 닮았다. 특히 애국가 1절의 ‘하느님이 보우하사’와 만주국 2차 국가 가사의 ‘하느님의 보우를 영원히 받으사(永受天祐兮)’는 한 사람이 작사한 것처럼 느껴진다.
◆애국가의 ‘무궁화 삼천리’ 와 만주 국가의 ‘인민 삼천만 인민 삼천만’
사실 가사로 따지면 만주국 첫 번째 국가(1933년~1942년) <만주건국가>가 한국의 <애국가>와 더 비슷하기가 쌍둥이 같다.
명의상 작사자는 만주국 초대 총리 정샤오쉬(郑孝胥, 만주괴뢰국 초대 총리)로 되어 있다. 작곡자는 '만주국 문교부선'이라는 애매한 주체로 표시되어 있지만 실제 작사자는 다롄에 활동하던 일본 음악인들이 맡았다. 실제 작사자도 정샤오쉬가 아니라 만주국의 실세 일본인 관료라는 설이 있다. 가사를 일견하면 이 설이 설득력이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천지 안에 새로운 만주
새로운 만주는 바로 신천지
굳건한 자립정신 아래 굳건한
평화가 우리의 나라를 세웠도다
사랑이 넘치고 증오가 없는
인민 삼천만, 인민 삼천만
(하략)
특히 ‘인민 삼천만, 인민 삼천만’의 대목에서 소름 돋는다. 일본인은 숫자 중에서 ‘3’을 각별히 좋아한다. 전범 기업 미쓰비시(三菱), 미쓰이(三井)... 헌데 만주괴뢰국 국가도 '인민 삼천만 인민 삼천만', 한국의 애국가도 ' 무궁화 삼천리' 세상에 이처럼 이상한 우연의 일치가 또 있을까?
정샤오쉬의 매국은 장징후이에 비해 경미했다. 그는 일본에 대한 매국보다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溥仪)에 대한 의리가 강했기 때문으로 분석하고 있다. 중국의 5대 상업은행의 하나인 교통은행(交通銀行)의 편액도 정샤오쉬 친필이다.
하지만 정샤오쉬의 매국 행적에 대한 중국인의 평가는 장징후이에 대한 것만큼 매섭다. 1937년 사망한 그의 유해는 선양의 누르하치 묘 근처에 매장되었다. 그러나 1960년대 근교의 농민들이 그의 묘를 파헤쳐 정샤오쉬의 유골을 불태워 버렸다. 묘지의 원래 비석과 석물들은 쪼개어져 농민들의 돼지 울타리로 사용했다고 한다.
가사와 작사자 뿐만 아니다. 작곡자와 곡조도 한국 애국가와 만주 국가도 많이 닮았다.
한국 애국가의 작곡자 안익태(安益泰, 1906년~1965년)의 친구인 일본의 유명한 작곡가 야마다 고사쿠 (山田耕筰, 1886년~1965년)다. 애국가 작곡자 안익태는 ‘에키타이안’으로 일본인 행세한 나치 음악회 회원이다. '애국가'는 '만주환상곡'의 끝부분이고 불가리아 민요 표절 의혹이 있다. 만주국 첫 번째 국가의 선율은 기미가요와 비슷하고 두 번째 만주국가는 일본 창가 풍이다.
한국의 애국가와 만주국 국가와 관련해 가장 크게 다른 점은 두 가지다. 첫 번째는 작사자와 작곡자에 대한 사후평가와 대우가 다르다는 점이다. 두 번째는 만주국 국가는 일제의 패전과 함께 만주국의 멸망으로 사라져 버렸으나 한국의 애국가는 아무런 법적 근거없이 계속 국가로 불리고 있다는 것이다.
일제는 무궁화 삼천리 애국가 후렴을 암송케 해 한국에서 만주를 분리, 한국을 식민지배했다. 다시 일제는 ‘삼천만 인민 삼천만 인민’ 만주국가 가사를 반복 암송케함으로써 만주와 몽골을 분할, 만주를 괴뢰화 통치했다.
<너무나 비슷한 애국가와 만주국 국가>
* 한국 애국가
ㅇ 작사자: 윤치호(이토지코 일본 귀족의회 의원 종일매국노 대부)
-가사핵심: 무궁화 삼천리
ㅇ 작곡자 에키타이 안(安益泰, 일본인, 나치 음악회 회원),
-곡조: 불가리아민요 표절, 만주국 찬가
*만주국 건국가
1.전기 (1932년~1942년)
ㅇ 작사자; 정샤오쉬(郑孝胥, 만주괴뢰국 초대 총리),
-가사핵심: 인민 삼천만 인민 삼천만 (人民三千萬 人民三千萬)
ㅇ 작곡자; 야마다 고사쿠(山田耕筰 일본인) 안익태의 절친
- 곡조: 일본 국가 기미가요와 유사
2. 후기(1942년~1945년)
ㅇ 작사자 :장징후이(张景惠, 만주괴뢰국 2대총리 )
-가사핵심: 영원히 하느님이 보우하사(永受天祐兮)
ㅇ 작곡자: 야마다 고사쿠(山田耕筰 일본인) 안익태의 절친
-곡조: 일본 창가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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