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남수의 열린 경제] #1. 지난 2010년 중국 국영방송인 CCTV는 기업의 탄생과 발전의 역사를 조명한 10부작 다큐멘터리 ‘기업의 시대’를 방송했다. 정부가 경제에 깊게 개입하는 국가자본주의 체제인 중국의 국영TV가 ‘기업의 시대’라는 프로그램을 내보낸 것 자체가 이례적이었다. 내용은 더 파격적이었다. CCTV는 기업을 ‘인류가 얻어낸 최고의 성과’로 추켜세웠다. 이 방송은 몇 발 더 나아간다. 야금부(冶金部)와 방적부 등 정부 부처를 없앴더니 철강과 방직 생산량이 세계 최대가 되었다고 진단했다. “수십개의 정부 부처가 퇴출된 것은 중국이 사회주의시장경제 모델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다”는 게 CCTV의 평가다. 신자유주의 시대의 미국도 하기 어려운 규제개혁을 사회주의를 한다는 중국이 단행한 사례이다. 글로벌 컨설팅기업인 가오펑의 CEO 에드워드 체는 저서 <중국은 어떻게 세계를 흔들고 있는가>에서 “시진핑은 정치적 통제는 공산당의 손에 남겨두되 경제적 자유를 확대해야 중국의 경제발전이 지속된다고 결론을 내린 듯 보인다”고 전한다. 규제 완화에 대한 중국 정부의 전향적 태도는 ‘성적표’에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 세계경제포럼(WEF)이 매기는 ‘정부 규제의 부담’(규제가 완화된 정도) 순위에서 중국은 19위로 상위권이다(한국은 87위). 국가경쟁력 순위 28위보다 9계단이 더 높다.
#2. 서브프라임모기지 사태로 금융위기가 세계 경제를 강타했던 2008년 10월 말. 시사주간지 타임에는 ‘돌아온 케인스(The Comeback Keynes)'라는 글이 실렸다. “지금 우리는 모두 케인지안이다. 1995년 타임 커버스토리의 제목이었던 이 말이 다시 돌아와 유행하고 있다. 우리가 현재 워싱턴과 다른 나라에서 보고 있는 것은 수요 붕괴로 경제가 무너지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다. 각국 정부들은 1930년대 초반의 암울한 시기에 케인스가 제안한 처방전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어 보인다.” 당시 작은 정부를 지향하는 공화당 출신의 미국 대통령 부시는 경제 위기에 직면해 ‘당의 소신’을 접고 ‘헬리콥터 머니’를 뿌리는 ‘큰 정부’의 정책 기조로 선회했다. 시장경제를 옹호하는 본산인 시카고대학의 로버트 루카스 교수조차 “야전 참호에서는 모두가 케인지안이 되는 것 같다”고 현실을 수용하는 발언을 했다.
우리는 선을 긋는 것을 좋아한다. 완고하게 그 선을 지키려고 한다. 하지만 이 두 사례는 그 선을 넘어 유연하게 이쪽저쪽을 오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 ‘경계의 선’은 바로 진보와 보수이다. 경제를 보는 시선을 둘로 가른 그 뿌리를 찾아 거슬러 올라가 보자. 보수와 진보, 그 이원화된 관점은 18세기 말 프랑스혁명 때 탄생했다. 보수는 아일랜드 출신의 영국 정치가인 에드먼드 버크가 깃발을 들었다. 대척점인 진보 쪽에는 영국 태생의 미국 이민자인 토머스 페인이 있었다. 버크는 급진적인 프랑스혁명에 반대하고 점진적 변화를 지지했다. 페인은 “세상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힘이 우리 안에 있다”고 진보의 선언을 했다. 정부의 역할을 바라보는 두 사람의 시선도 판이했다. 버크는 정부의 ‘경제 조작’은 사회 질서에 심각한 지장을 줄 수 있다며, 경제는 내버려둘 때 가장 잘 작동한다는 입장을 취했다. 페인은 ‘강 건너편’에 있었다. 정부는 노인과 유아,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을 부양할 도덕적 의무가 있다며 복지제도를 강력하게 지지했다. 이같이 상반된 세계관은 이후 케인스와 하이에크의 분기(分岐)로 이어진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케인스는 정부의 적극적 경제 개입을, 하이에크는 시장 자율경제를 내세워 두 개의 큰 축의 경제적 사조(思潮)를 형성해왔다.
이 두 이론은 현실에서는 어떻게 작동했을까. 어느 한쪽의 완승도 없었고 완패도 없었다. 한쪽이 맞는 듯하다가 다른 쪽이 우위를 점하기도 했고, 서로 섞이기도 했다. 현실이 이론에 우선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케인스주의를 채택한 최초의 공화당 대통령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한국전쟁 후 경기후퇴가 시작되자 광역 고속도로망 건설 등 정부 지출을 크게 늘렸다. 민주당 소속 클린턴은 정반대의 경우이다. 막대한 규모의 정부부채와 재정적자를 떠안은 그는 ‘큰 정부의 종언’을 선언하며 정부의 허리띠를 졸라맸다. 금융기관에 대한 규제도 대폭 줄였다. 클린턴은 공화당 정책을 쓴 민주당 대통령이라는 말을 들었다. 사실 트럼프도 법인세 인하 등 친시장 정책을 펴기도 했지만, 중앙은행에 금리 인하를 압박하고 기업의 인수·합병에 개입하는 ‘큰 정부’의 모습도 서슴지 않고 있다. 이론의 차이는 선명하지만 현실은 실용적으로 또는 필요에 따라 가변적으로 움직이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우리나라는 어땠을까. 필자는 한국 사회에서의 진보와 보수는 정치적 대치 관계의 성격이 강하고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깊은 경제 철학의 차이를 가지고 있다고는 보지 않는다. 물론 법인세, 재벌 개혁, 노동 등 정책에서 양 진영은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신념으로 ‘정부 개입’과 ‘시장 자율’을 고수하는 경제 철학의 경계선은 그리 뚜렷하지 않다고 본다. 실제로 우리나라에 ‘작은 정부’가 존재한 적이 없지 않은가. 보수 정부에서 친기업·친시장 정책을 편 적이 있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한국 정부는 권위주의적 성격이 강해 ‘큰 정부’를 벗어난 적이 없다. 강력한 자원 동원과 물가 통제, 기업 부동산 강제 매각 조치 등이 보수 정부에서 이뤄졌다. 정부의 역할을 키우고 친노동 정책을 펴온 진보 정부 아래서도 자본시장 개방, 법인세 인하, 한·미FTA 체결 등 친시장 정책이 시행됐다. ‘좌’와 ‘우’ 경제정책이 혼용돼온 것이다.
지금까지 이런 얘기를 해온 것은 현재 진행형인 사안에 대한 진보와 보수 사이의 이분법적 마찰음이 경제의 운영에 걸림돌이 되고 있어서이다. 심각한 현안에 대해 정부가 적극적으로 개입하면 우리나라에서 한 번도 제대로 시행돼 본 적이 없는 ‘시장 자율’의 논리를 들어 반대한다든가, 아니면 대기업에 대해 규제를 푸는 방안을 얘기하면 친재벌·반개혁으로 몰아세우는 일이 대표적인 예이다. 현재 한국 경제의 진로를 헤쳐가는 데는 진영논리에 매이지 않는 실용적 접근이 긴요하다. 코로나19 사태 속에서 우리 경제가 선방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37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모두가 올해 큰 폭의 마이너스 성장이 예상되는 가운데 우리나라의 성장 전망치는 –0.8%로 가장 높은 수준이다. 미국이나 유럽에서 실시된 것 같은 강도 높은 봉쇄조치가 없었던 데다 정부가 발 빠르게 재정과 통화정책의 곳간을 푼 데 힘입은 것이다. 위기 국면 속에서 ‘퍼스트 무버’로 치고 나갈 기회가 우리 앞에 주어져 있다.
문제는 이 같은 긍정적 신호에도 불구하고, 코로나19 이전에 우리 경제가 안고 있던 구조적 문제는 여전히 미해결 상태로 남아 있다는 데 있다. 무엇보다 경제의 본질적 체력을 나타내는 잠재성장률이 2000년대 초반의 5%에서 지금은 2.5% 선으로 떨어진 데 이어 2020~2060년 기간에는 평균 1.2%(OECD 전망)로 더 낮아질 것으로 보인다. 저출산 및 고령화에 따른 생산가능인구의 감소, 투자 부진, 낮은 생산성 등이 그 요인이다. 여기에다 기술 수준은 사실상 중국에 따라잡혔다. 한국과학기술평가원이 2018년 기술 수준을 국제 비교한 내용을 보면 최고 기술보유국인 미국과의 기술 격차가 한국과 중국이 각각 3.8년으로 똑같다. 중국은 우주, 항공, 해양, 국방 기술에서는 한국에 2~3년 앞서 있다. 게다가 양극화도 심각한 상태다. 세후 지니계수로 측정한 소득 불평등 정도는 OECD 회원국 중 7번째로 나쁘고 노인상대빈곤율은 가장 높다.
성장 체력도 키우고 양극화도 완화해야 하는 이중의 과제에 직면해 있는 게 한국 경제의 현 좌표이다. 시장 대 정부, 기업 대 노동, 성장 대 분배의 경직된 이분법적 사고로는 구조적 문제의 매듭을 풀고 앞으로 전진하기가 어렵게 돼 있다. 그래서 필자는 성장을 중시하는 ‘오른손’과 분배를 강조하는 ‘왼손’을 동시에 사용하고 이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가 두텁게 형성된 ‘양손잡이 경제’를 한국 경제가 지향해야 할 경제 운영의 새로운 틀로 제안한다. 실용적으로, 그리고 유연하게 진보와 보수의 정책 수단 중 필요한 것은 다 가져다 쓰자는 것이다. 이는 복지를 두텁게 해 골고루 잘사는 사회를 실현해 가면서 과감한 규제 혁파를 통해 성장의 불을 재점화하는 노력이 동시에 진행돼야 함을 뜻한다. 또 산업현장에 평화를 가져오기 위해 노사정 대타협을 이루면서 기업을 바라보는 긍정적 시선에 대한 대타협도 같이 만들어 내야 한다. 기업을 성장의 주역으로 인정하고 마음껏 뛸 수 있게 해주는 사회적 분위기가 조성돼야 한다. 대신 기업은 성장의 열매를 근로자, 거래기업, 고객, 지역사회 등 이해관계자와 공유하는 낙수효과를 복원하는 데 협조해야 한다. 우리가 바라봐야 할 역할 모델 중 한 곳은 북유럽이다. 북유럽은 산업 정책에 있어서는 작은 정부를, 복지에 있어서는 큰 정부를 절묘하게 조화시켜 경제도 강하고 국민도 행복한 ‘국민의 집’을 현실로 만들어 놓았다. 헌법 제119조는 개인과 기업의 경제상의 자유와 창의,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성장, 적정한 소득분배, 경제민주화 등을 한국 경제가 지향해야 할 가치로 제시하고 있다. 이 조항은 보수의 ‘오른손’과 진보의 ‘왼손’ 중 어느 손도 배제하고 있지 않다. 어찌 보면 ‘양손잡이 경제’의 실용 정신이 헌법 안에 이미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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