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전 학고재청담에서 열린 전시에서 절묘한 균형 감각을 바탕으로 다른 미술 양식들을 하나의 작품에 담아냈던 톰 안홀트가 이번에는 다양한 사랑의 감정을 전한다.
학고재는 오는 11월 21일까지 서울 종로구 학고재 및 학고재 오룸(OROOM)에서 안홀트 개인전 ‘낙화(Fallen Flower)’를 연다.
안홀트는 국제 미술계가 주목하는 회화 작가다. 지난해 런던, 베를린, 로스앤젤레스, 코펜하겐 등 세계 곳곳에서 개인전을 선보여 좋은 반응을 이끌어냈다.
지난 2019년 학고재청담에서 아시아 첫 개인전을 선보인 이후 학고재에서 2년 만에 개최하는 개인전이다.
안홀트는 1987년 영국 바스에서 아일랜드계 어머니와 어린이 책 번역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페르시아계 유대인 조상을 뒀다.
안홀트는 다양한 나라의 문화와 미술에 관심이 많다. 마티스, 세잔, 피카소, 그리고 샤갈 등 모더니즘 계열의 손꼽히는 작가들의 영향을 받았으며 서아시아 삽화의 한 장르인 ‘페르시안 미니어처’의 특징을 융합했다.
안홀트는 미술사와 가족사, 경험과 상상 속 이야기들을 하나의 화면 위에 중첩한다. 복합적인 서사의 망을 특유의 영화적 감각으로 엮어내는 일이다.
지난 27일 개막한 전시를 관통하는 주제는 ‘사랑의 서사’다. 늘 아름답지만은 않은 사랑의 양가적인 측면에 대한 이야기다.
학고재 본관에서 여는 이번 전시는 안홀트가 새롭게 제작한 작품 24점을 선보인다. 유화 12점과 수채화 12점을 선별하여 다채롭게 구성했다.
지난 27일 학고재에서 열린 기자간담회를 위해 독일 베를린에서 온 안홀트는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사랑은 다양한 모습을 갖고 있다. 모든 사랑은 양가적이다”라며 사랑을 주제로 작업한 이유를 설명했다.
전시에 선보이는 화면들은 저마다 낭만적인 동시에 불안하고, 때로는 폭력적인 사랑 이야기를 품고 있다.
전시명인 ‘낙화’는 줄기로부터 떨어진 꽃을 가리킨다. 아름다움을 간직한 채 미약하게 살아 있는 꽃 봉우리가 사랑의 정서를 상징한다.
작가는 작은 이야기들을 엮어 책을 짓듯 전시를 구성한다. 각 화면은 독립적 서사를 지니고 있다. 동시에 하나의 전시 안에서 전체의 맥락을 구성한다.
안홀트는 “나의 작품과 작품, 그리고 전시와 전시는 모두 연결 돼 있다”라며 ”작품들에서 공통된 색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그는 사랑의 다양한 감정을 고백하듯 솔직하게 풀어냈다. 때로 ‘부서진 바위 (무명의 페르시아 세밀화)’(2021)의 연인처럼 폭력성을 드러낸다.
‘2 AM’(2021)의 인물이 잠든 밤중 침대 밑의 유령이 되어 꿈의 세계를 괴롭히기도 한다. 사랑은 ‘낯선 사람’(2021)이 드러내는 고립의 정서를 감내하는 일이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들은 ‘밤중의 만남’(2021)에서처럼 결국 화해를 시도한다. ‘새로운 새벽’(2021)의 자상한 여인의 표정은 포용적인 모성을 상징한다.
안홀트는 “전시 뒤쪽에 모든 것을 어루만지는 따뜻한 사랑을 표현하고 싶었다“라고 설명했다.
안홀트는 회화 작가로서 독자성을 확립하기 위하여 미술사와 자신의 가족사를 꾸준히 연구해왔다. 이에 삶의 경험으로부터 얻은 영감을 더해 자신만의 독특한 화면을 구축해낸다.
안홀트는 청소년기 런던 테이트 브리튼에서 막스 베크만의 전시를 관람한 것을 계기로 작가의 꿈을 키웠다.
유럽의 모더니즘 작가들로부터 받은 영향을 기반 삼아, 기독교 중심의 서구 문화와 서아시아의 페르시안 세밀화 양식을 작품세계에 끌어들였다.
서구 모더니즘과 이슬람의 문화적 요소가 하나의 화면 위에 어우러져 신비로운 분위기를 조성한다. 다양한 장면들을 하나의 화면 위에 중첩하여 구성하는 방식이 영화의 기법을 연상시킨다. 화면 속 밤하늘에 빛나는 달, 기하학적 무늬들, 평면적인 배치는 페르시아 세밀화에서 참조한 요소들이다.
이번 전시명과 같은 제목을 가진 회화 ‘낙화 I’(2021)는 기하학적 배경 위에 놓인 화병의 형상을 전면에 드러내는 회화다. 일견 전형적인 정물화의 구도를 연상시킨다.
이 화면에서 핵심적 의미를 지니는 것은 화병 바깥의 바닥에 자리한 한 송이의 낙화다. 줄기로부터 떨어져 나와 세상으로부터 고립된 꽃의 모습이 사랑의 고독을 투영한다.
시듦을 예견하면서도 본연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꽃 봉우리가 사랑의 양가적인 측면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전시에 선보이는 다양한 화면 속 사랑 이야기들이 이 화면 안에 귀결된다.
안홀트는 “이번 전시의 주제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라고 말했다.
서아시아의 삽화 장르인 페르시아 세밀화는 이슬람 회화의 대표적인 화법이다. 안홀트의 아버지 측 조상은 16세기 말 유럽으로 이주한 페르시아계 유대인이다. 작가는 자신의 가족사를 탐구하는 과정에서 페르시아 세밀화에 관심 갖게 되어 형식과 색채 등을 자주 참조하게 됐다.
‘2 AM’(2021)에서 그 영향이 두드러진다. 기하학적 도형과 패턴이 화면에 장식성을 더한다. 평면 위에 서사를 나열하는 구성 방식이 신화적인 분위기를 이끌어낸다.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시선의 구도와 달의 도상 또한 페르시안 세밀화의 특징이다.
화면은 중심선을 기점으로 분할되어 있다. 화면 상단의 하늘 위에 빛나는 유백색 달이 모든 것을 지켜보는 초월적 존재를 연상시킨다. 달빛 아래 잠든 인물이 한쪽 팔을 화면의 하단부를 향해 늘어뜨리고 있다. 하단의 어두운 공간은 사랑의 이면을 상징한다. 침대 아래 숨어 있는 유령 같은 존재가 꿈속 세계를 괴롭힌다.
‘낯선 사람’(2021)은 관객의 시선을 어둡고 습한 동굴 속 공간 내부로 초대한다.
‘2 AM’의 침대 아래 어둠과 같은 맥락의 장소이지만, 화면 속 인물의 상황을 보다 공감각적으로 드러낸다. 주체의 고립 상황을 시야 가까이 보여주며, 관객으로 하여금 마치 그 동굴 안에 함께 갇힌 듯한 거리감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사랑에 의해 벌을 받는 남자는 발목까지 잠기는 습지의 동굴 속에서 무언가를 찾아 헤매는 모습이다. 동굴 바깥의 세상 사람들은 지극히 평범한 일상을 살아간다. 극명한 대비가 고립의 정서를 극대화한다. 한편, 극복해 나아갈 세상이 늘 가까이 자리해 있다는 희망을 암시하기도 한다.
안홀트의 작업은 주로 콜라주와 수채화로부터 시작된다. 다양한 이야기들을 수집하여 여러 층위로 중첩하고, 영화적인 감각으로 제련한다. 이번 전시에서는 안홀트가 작년부터 올해까지 제작한 수채화 12점을 함께 살펴볼 수 있다.
안홀트는 “학고재 공간을 염두해두고 작품을 전시했다”라며 “옛날과 현대의 공존은 나의 작업과도 많이 닮아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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