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순간을 끝으로 대표팀(협회)과 계속 가기 힘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지난 5일 파리 올림픽 배드민턴 여자 단식에서 금메달을 딴 안세영의 입에서 나온 폭탄 발언이다. 흔히들 협회에 감사하며 금메달의 영광을 누구누구에게 돌리겠다는 의례적인 인사말 대신 안세영은 작심 발언을 쏟아냈다. "제가 부상을 겪는 상황에서 대표팀에 대해 너무 크게 실망했다. 그 순간을 잊을 수가 없다"고 밝힌 안세영은 "처음에 오진이 났던 순간부터 계속 참으면서 경기했는데 작년 말 다시 검진해보니 많이 안 좋더라"면서 "꿋꿋이 참고 트레이너 선생님이 도와주셔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고 말했다. 자신의 부상이 생각보다 심각했는데도 너무 안일하게 생각한 대표팀한테 많이 실망했다는 얘기였다. 그래서 안세영은 “선수들을 체계적으로 잘 키워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안세영이 공식 기자회견에서 했던 말은 2022 항저우 아시안게임 결승전에서 무릎을 다치게됐던 과정과 그 이후 대표팀의 대처 과정을 지적한 것이었다. 실제로 안세영은 작년 10월 첫 검진에서 짧게는 2주 재활 진단이 나오며 큰 부상을 피한 줄 알았지만, 재검진 결과 한동안 통증을 안고 뛰어야 한다는 소견이 나왔었다. 그럼에도 혹사당하다시피 출전해야 했던 안세영이 대한배드민턴협회의 선수 부상 관리, 선수 육성 및 훈련 방식, 협회의 의사결정 체계, 대회 출전 등에 관한 문제점을 제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금메달을 목에 건 안세영의 작심 발언은 일파만파의 충격을 던져주었다. 대한배드민튼협회와 대한체육회는 그의 폭로와 관련해 진상조사위원회를 만들어 본격적인 조사에 들어가겠다고 밝혔다. 파리 올림픽 폐회 후 조사에 착수한다는 것이다. 대한체육회는 그래서 문제를 발견하면 감사로 전환해 대한배드민턴협회, 국가대표선수촌 훈련본부 등 안세영과 관련한 모든 사안을 자세히 살피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파장은 정부로까지 번졌다.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정확한 사실관계를 파악해 개선해야 할 필요성이 있으면 바꾸겠다"고 했다. "이 문제는 대한배드민턴협회, 지도자가 선수를 위해 본연의 역할을 다하고 있는지가 핵심”이라는 것이 유 장관의 말이었다. 급기야는 용산 대통령실도 언급하는 사안이 됐다. 대통령실은 “안 선수의 폭로는 윤석열 대통령도 인지하고 있는 사안"이라며 "안 선수가 문제를 제기한 만큼 올림픽이 끝나는 대로 문체부가 정확한 진상 조사에 나설 필요가 있다"고 입장을 내놓았다. 그리고 "강 건너 불 보듯 할 수는 없는 일로 안 선수와 협회의 입장을 듣고 공정히 처리할 것"이라고 공언했다.
이제 안세영이 폭로한 내용은 그대로 지나칠 수 없는 사안이 되었다. 철저한 진상조사를 통해 협회가 과연 선수들을 위해 존재해왔는가를 엄정하게 가려야 할 상황을 맞게된 것이다. 물론 아직까지 안세영의 폭로 내용은 조사를 통해 확인된 것은 아니니 일방적인 주장이라고도 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동안 안세영이 부상에도 불구하고 강행군 하듯이 출전했던 과정을 돌아보면 근거없는 주장이라고 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실제로 지난해 안세영이 참가한 대회만 약 20회에 이르고 이 가운데는 세계 대회만도 14회나 된다. 올해에도 이미 6∼7개의 대회에 출전했다. 일부 대회에서 본인의 의사에 따라 출전한 사례가 있다 해도, 전체적으로는 아픈 몸을 이끌고 혹사당하는 출전을 했다는 의심이 강력하게 드는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대한배드민턴협회는 안세영의 폭로에 반박과 부인으로 일관하는 태도를 보였다.
당초 안세영과 같은 비행기로 귀국할 예정이던 김택규 대한배드민턴협회장은 비행기를 바꿔 몇 시간 먼저 도착해서는 “갈등은 없었다. 왜 그런 발언을 했는지 확인해보겠다”고 폭로 내용을 부인했다. 이어 협회는 자신들의 입장을 담은 A4 용지 10쪽에 가까운 보도자료를 언론에 배포했다. 협회 측은 이 보도자료를 통해 안세영의 부상을 방치했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아니라고 반박했다. 그리고 안세영의 눈 높이에 안맞을 뿐 다른 선수에 비해서 안세영에게는 이미 특혜를 제공하고 있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본인의 강한 의지로” 참가했던 대회의 사례를 들기도 했다.
물론 내용에 따라서는 서로 간의 오해에서 비롯된 부분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올림픽대회에서 금메달을 딴 선수가 그런 작심 발언을 했을 때는 충분히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법한 것이 상식이다. 그렇다면 협회는 부인으로 일관하기 이전에 안세영의 문제 제기를 경청하며 무엇이 문제였던가를 파악하려는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우선이었다. 문제의 근본은 들여다보려 하지 않은채, 최선을 다했다는 변명부터 내놓는 협회의 모습에서는 젊은 선수들을 대하는 어른의 모습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오히려 어른스러운 말은 안세영의 입에서 나왔다. "제가 잘나서 이야기한 것도, 누군가와 전쟁하듯 이야기한 것도 아니다"라는 점을 안세영은 강조했다. 그러면서 "제가 하고픈 이야기에 대해 한번은 고민해주고 해결해주는 어른이 계시기를 빌어본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런 어른은 체육계에 보이지 않았다. 다들 폭로가 터지고 나니까 그때 가서야 여론을 의식하여 허둥대는 모습들을 보여주고 있다. 선수와 협회 간의 갈등은 과거에도 종종 있어왔지만, 보다 어른스러운 소통과 해법의 노력이 필요해 보인다. 물론 그런 노력의 우선적인 책임은 협회 측에 돌아간다.
우리 정치가 국민들을 위한다는 말만 하고는 서로가 자기 당파의 이익만을 위해 싸우며 존재하듯이, 협회의 어른들도 선수들을 위해 존재한다는 말만 하고는 자신들의 이익만 챙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짚어볼 때가 됐다. 어른이 보이지 않는 것은 정치권이나 체육계가 마찬가지 아닌가 싶다.
▷연세대 대학원 사회학 박사 ▷전 경희대 사이버대학교 NGO학과 외래교수 ▷전 한림대 사회학과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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