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일 오후 2시경. 서울시내 중심을 가로지르는 청계천을 따라 걷는다. 점심 시간이 지났지만 제법 붐빈다. 굽이굽이 물길을 따라 놓인 의자엔 시민들이 나란히 앉아있다. 팝송이 흐르는 가운데 청아한 풍경 음이 간간이 들린다. 시원한 가을 바람을 맞으며 시민들은 책에 집중하기도, 담소를 나누기도 한다.
청계천 첫 번째 다리인 모전교를 지나면 유독 폭이 넓은 데다 정교히 구름무늬가 새겨진, 다소 사치스런 돌다리가 눈에 띈다. 그때 마침 중국인들로 보이는 한 무리의 관광객이 다리 위에서 모여 관광 가이드의 설명을 열심히 듣고 있었다. 다리 아래서는 문화해설사가 새겨진 기둥을 짚으며 무언가를 설명한다.
도심 한가운데 있는 고풍스러운 돌다리의 이름은 '광통교'로 조선시대부터 자리를 지켰다. 이들 관광객은 광통교에 담긴 수백년 전의 역사를 듣고 있으리라. 다소 어색하게 자리하고 있는 구름무늬, 불상 조각이 새겨진 이 석조물은 사실 조선 왕조를 연 태조 이성계의 계비, 신덕왕후의 능에 자리하고 있었다.
'왕자의 난'을 일으킨 태조의 아들 이방원은 흙다리였던 이곳 광통교가 마침 큰 비로 유실되자, 신덕왕후의 무덤에 있던 비석으로 이 다리를 만들도록 지시했다. 이방원 자신이 아닌 이복동생을 세자로 옹립한 데 대한 분풀이로 지나는 행인들로 하여금 신덕왕후를 짓밟게 한 것이다. 광통교는 청계천의 동서를 잇는 다리 중 가장 크다. 조선왕조 500여 년 동안 어가행렬과 사신행렬이 지났다. 또한 정월 대보름이 되면 도성의 많은 남녀들이 모여 답교놀이를 하거나, 주변에 상점들이 줄지어 사람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500년이 지난 지금 광통교는 여전히 청계천을 대표하는 다리로 위치를 지키고 있다. 빽빽한 직사각형 건물 사이에 자리한 석조 다리는 낭만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때론 버스킹 공연이 열리기도 하고, 석가탄신일이나 크리스마스 시즌에는 온갖 예술작품들로 꾸며져 낭만을 더하기도 한다. 드라마 ‘내 남편과 결혼해줘’에서는 백은호가 첫사랑 강지원에게 고백하는 장소로 등장했다. 많은 매체에서 사랑을 고백하는 장소로 등장해 '소울스폿'으로 선정된 곳이기도 하다.
청계천은 많은 역사를 품고 있다. 이날 돌 위에 작은 한복 인형이 이스터에그처럼 눈길을 끌었다. '왕의 보물을 찾아라'는 안내와 함께 QR코드가 있어 걸음을 멈추고 휴대폰을 든 사람들이 모여든다. QR코드를 찍으면 인스타그램 계정으로 연결돼 "청계천에 꽃 핀 사랑, 조선남녀"라는 게시물이 뜬다.
"청계천은 왕들의 사랑 이야기가 숨겨진 곳이기도 하오. 야사에 따르면, 한 임금께서는 영희전에서 돌아오던 중 수표교에서 우연히 한 소녀를 보고 한눈에 반하셨지. 그 소녀는 나중에 궁으로 들어가 임금의 사랑을 이루게 되었소. 임금의 마음에 담긴 사랑은 청계천의 물결처럼 순수하고 깊었으며, 그 이야기는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소이다."
청계천 모전교부터 삼일교까지 청계천 투어프로그램으로, '보물찾기' 행사가 이뤄지고 있었다. 상품이 탐나지는 않았지만 찾는 재미가 쏠쏠해 그때부터 주의 깊게 살피며 걷기 시작한다. 어렵지 않게 돌담에서 '말을 탄 정조' 인형을 발견했다. 정조의 어머니 헤경궁 홍씨의 회갑연날, 정조가 자신의 가마에서 내려 말을 타고 어머니의 가마를 정성스럽게 따랐다는 것이다. 정조의 효심을 짐작할 수 있는 '정조대왕 능행반차도'는 청계천에 긴 벽화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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