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수의 중동워치
트럼프 2기 중동 질서재편에서 쿠르드 이슈
이스탄불에서 바라보는 중동은 서울보다는 훨씬 역동적이고 긴박하게 돌아간다.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 집권 2기 출범을 앞두고 이스라엘의 네타냐후 정권은 호재를 만난 듯 주변국가에 대한 군사개입 강도를 높이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 주도로 추진될 가자지구의 하마스와 레바논의 헤지볼라와의 새 휴전안에 대비해 가자북부를 초토화해서 팔레스타인 주민을 제거한 안전지대를 만들려하기 때문이다. 이미 회복불능 상태의 가자지구 난민촌에 대한 폭격과 민간인 학살을 계속하는 행위에 지구촌이 들끓고 있지만, 미국과 유럽 일부 국가들은 여전히 관심밖의 문제처럼 방관하거나 민간인 보호라는 레토릭만 남발하고 있다.
이런 혼란을 놓칠세라 이스라엘은 즉각적으로 시리아 국경 내로 진입해서 전략적 요충지를 장악하고 있다. 시리아의 국정 혼란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또 다른 나라는 튀르키예다. 바로 자국 안보의 위협적인 무장세력으로 지목돼 왔던 시리아 쿠르드 민병대인 인민수호부대(YPG)를 약화시키기 위함이다. 그동안 YPG는 시리아 반군의 중추세력으로 IS 소탕에 미국과 공동보조를 맞춰왔다. 미국의 군사지원으로 존재감을 키우면서 튀르키예의 최대 적대 세력인 쿠르드노동당(PKK)과 협력하는 등 튀르키예 안보에 심각한 위협이 되어왔다. YPG를 둘러싼 이해관계 상충은 두 NATO 맹방인 튀르키예와 미국이 갈등하는 중요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 이처럼 트럼프 시기 중동질서 재편에도 쿠르드 문제가 다시 핵심 어젠다로 부각되고 있다.
쿠르드가 누구인가? 3500만명이라는 중동 최대의 종족집단임에도 자치와 독립이라는 절박한 꿈을 이루지 못하고 튀르키예, 이라크, 이란, 시리아 등지에서 사회적 편견과 경제적 차별에 시달리고 있는 세계 최대의 유랑민족이다.
유럽 강대국들은 1차 세계대전을 마무리하는 1920년의 세브르 조약을 통해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이 제창한 민족자결주의 원칙을 존중해 쿠르드인의 독립을 천명했다. 전쟁에서 평화와 공존으로 가는 중요한 길목에서 강대국들은 또다시 추악한 발톱을 드러냈다. 이라크 북부 쿠르드 지역에서 대규모 유전이 발견되고, 튀르키예가 쿠르드 독립국 창설에 강하게 반발하자, 영국과 프랑스는 1923년 로잔 조약에서 3년 전 세브르의 약속을 헌신짝처럼 던져버렸다. 독립은커녕 쿠르드 지역을 다섯 나라로 쪼개 각각의 나라에서 소수집단으로 살아가게 만든 것이다. 쿠르드인들의 비극과 울분의 시작이었다.
많은 쿠르드인들은 주어진 냉엄한 현실을 수긍하면서 각각의 지배국가 정책에 표면상 순응해 갔지만 자치와 독립을 위한 투쟁을 멈출 수는 없었다. 가장 대표적인 튀르키예의 쿠르드 저항조직이 PKK다. 1984년 압둘라 외잘란에 의해 결성된 이 조직은 전쟁에 가까운 무장투쟁으로 그동안 4만명에 달하는 튀르키예 군경을 희생시키면서 극렬한 저항을 해왔다. 동시에 쿠르드인들의 희생과 고통도 매우 컸다. 50만명 이상이 강제이주를 당하고 3000개 이상의 쿠르드 마을이 폐허가 되거나 지도상에서 사라졌다. 결국 지도자 압둘라 외잘란이 체포되고, 튀르키예 당국의 강도 높은 대테러 전쟁으로 PKK는 이라크 북부 산악지대로 밀려났지만 그들의 투쟁은 사그라들 줄 몰랐다
이처럼 박해받던 튀르키예 쿠르드인들에게 전환점이 찾아왔다. 1990년대부터 튀르키예 정부의 유럽연합 가입 신청과 맞물려 쿠르드 언어 사용과 문화 정체성 유지를 용인해주었기 때문이다. 유럽의회가 가입 전제조건으로 쿠르드 소수민족에 대한 문화적 기본권 보장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제한적이지만 자신의 말을 쓰고 쿠르드어 신문 발간과 방송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더욱이 2011년 아랍 민주화 시위의 확산으로 시민사회의 성장과 문화적 다양성에 대한 인식이 확산되면서 쿠르드 소수민족들의 자결권과 문화적 정체성 보존 요구도 더욱 힘을 얻고 있다. 이미 미국과 협조한 이라크 쿠르드들은 한때 대통령직을 차지했고, 북부 유전지대의 원유이익을 공유하면서 착실하게 자치를 실현해 나가고 있다.
최근 시리아에서도 아사드 정권 붕괴에 앞장선 YPG 등이 정치적 지분을 최대한 활용하면서 북동부 유프라테스 지역을 중심으로 자치권을 꿈꾸고 있다. 이를 위해 이웃 이라크의 쿠르드 자치정부와도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이미 이달 초 시리아 쿠르드 대표단이 이라크 아르빌에서 쿠르드 최고 지도자 마수드 바르자니와 회동하면서 동족 공동체 협력을 논의했다.
이런 움직임이 튀르키예 당국을 극도로 긴장시키고 있다. 튀르키예가 시리아 영토 내로 군대를 보내 시리아 쿠르드 민병대 YPG 공격에 나서고 있는 배경이다. 자국 내 PKK와 연계를 차단하고 이번 기회에 아예 PKK 군사조직을 와해하겠다는 초강경 군사작전에 돌입하고 있다. 작전의 성공을 위해 튀르키예 정부는 이라크 쿠르드 자치정부 메스루르 바르자니 총리를 앙카라에 초대하여 협조를 구하고 이란과도 외교적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튀르키예 내 쿠르드 지도부가 발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시리아 쿠르드가 과도기의 시리아 신정권 창출에 유리한 입지에 있는 긍정적 상황 변화도 튀르키예의 쿠르드 지도부를 자극했을 것이다. 튀르키예 의회에 57석의 의원을 가진 쿠르드 정당인 DEM(인민평등민주당) 지도부가 종신형을 선고받고 특별 감옥소에서 복역중인 쿠르드 지도자 압둘라 외잘란을 면회한 직후 그의 지침에 따라 새로운 평화안을 튀르키예 정부에 제시하기에 이르렀다.
쿠르드의 자치와 자율성을 보장해 준다면 지난 40여 년간의 무장투쟁을 포기하고 튀르키예와 공존·공생하겠다는 제안이다. 물론 공개되지는 않았지만 PKK 지도자 압둘라 외잘란의 사면과 석방카드도 함께 논의될 것으로 보인다. 튀르키예 정부에 의해 테러조직의 수괴로 체포되어 종신형으로 복역 중인 외잘란의 석방은 그야말로 쿠르드인들의 투쟁과 자치권 확대를 위한 역사적 이정표가 될 것이다.
튀르키예 정부는 아직까지는 단호한 입장과 원칙을 천명하고 있다. "PKK가 무기를 버리지 않는 한 어떤 평화협상도 진전을 기대하기 어렵다."
그렇지만 PKK와 협상의 문을 열어놓고 있다는 점은 고무적이다. 튀르키예 정부가 테러조직으로 규정한 PKK와 YPG와의 협상이나 새로운 정책 변화는 미국의 태도에 달려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일치된 견해다.
중동지역의 패권구도를 포기할 수 없는 미국과 유럽국가들은 항상 인권적 보편가치와 글로벌 스탠더드를 내세우며 쿠르드인들에게 매우 우호적인 정책을 펴 왔다. 인도주의적인 접근이라기보다는 쿠르드 자치 카드를 통해 튀르키예, 이라크, 시리아, 이란 등을 압박하여 중동에서의 헤게모니를 유지하겠다는 기회주의적인 정책의 연장선으로 보인다. 그간 쿠르드인들에 대한 조직적인 탄압과 박해에 침묵하면서 오히려 가해국들을 지원해 왔기 때문이다. 특히 미국이나 유럽국가들은 PKK를 테러단체로 비난하면서도 수시로 튀르키예, 이라크, 시리아 등지의 쿠르드 조직들을 비밀리에 지원하는 이중 플레이를 해왔다. 이런 강대국들의 음모에 쿠르드인들은 항상 좌절감을 느껴왔다. 그래서 언제 배신당할지 모르는 역사적 교훈을 되뇌며 강자에게 붙어서 살아남는 길을 배웠다. 오스만 제국이 와해되자 재빨리 영국에 붙었고, 2차 세계대전 이후 세상의 무게 중심이 미국으로 옮겨가자 미국 편으로 돌아섰다. 2013년 이라크 전쟁 때는 미국과 함께 사담 후세인 정권을 무너뜨리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시리아 내전에서도 쿠르드 민병대(YPG)가 반아사드 투쟁의 선봉에 섰다. 미국을 도와 IS 궤멸에 1만명의 전사자를 내며 주도적 희생을 감수했다. 미국이 그 대가를 제대로 치를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시리아 쿠르드를 지지해야 하는 의리와 신의보다는 튀르키예라는 70년 NATO 맹방을 잃고 이스라엘 안보와 미국의 절대국익이 달려 있는 중동 정책 구도가 약화되는 국익 손실이 훨씬 크기 때문이다.
튀르키예는 미국에게 YPG 지원에서 손을 떼라고 집요하게 요구하고 있다. 그동안 시리아 동부에 2000명의 미군이 주둔하면서 IS 소탕을 명분으로 YPG에 대한 무기지원과 군대훈련을 실시해 왔기 때문이다. 아사드 정권 붕괴 이후 양국 외교 수뇌부도 시리아 내의 YPG 문제와 새 시리아 정부구성 과정에서 긴밀한 협의를 시작했다. 지난 8일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의 협상개시 선언에 이어 트럼프 행정부의 정치담당 차관보 내정자인 존바스가 앙카라를 전격 방문해서 실질적인 대화를 이어가고 있다. 미군의 시리아 주둔 궁극적 목표는 이란의 시리아 지원을 차단하기 위한 것이고 YPG는 미국의 이익 대리세력으로 쉽게 포기할 수 없는 카드다. 그러나 미국과 튀르키예가 이라크를 동맹진영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면 튀르키예는 PKK 통제를, 미국은 이란의 시아파 벨트 진출 차단을 꾀할 수 있어 윈윈하는 전략으로 부상하고 있다.
다시금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정권 붕괴 이후 찾아왔던 자치권 확보라는 쿠르드 공동체의 장밋빛 희망이 시리아 아사드 정권붕괴 이후에도 똑같은 상황으로 재현될 가능성이 커졌다. 주변국들의 이해관계 상충으로 아사드 정권 타도의 일등공신임에도 쿠르드는 다시 한번 역사의 희생양으로 남지 않을지 걱정이 앞선다.
필자 주요 이력
▷한국외대 ▷터키 이스탄불대학 역사학 박사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명예교수 ▷한국튀르키예친선협회 사무총장 ▷중앙아시아연구원(UNESCO-IICAS) 학술위원(한국대표) ▷성공회대 석좌교수 ▷국내외 저서 90여 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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