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0년 5·18 이후에도 계엄군의 집단적인 성추행과 성희롱이 있었다는 증언이 새로 나왔다. 그동안 쉬쉬하며 소문만 무성하던 군인들의 집단 성폭력이 추가로 나옴에 따라 국가 차원에서 법과 제도로 피해자를 책임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제기된다.
5·18 민주유공자 장해 14급인 A 씨(65)는 지난달 27일 전라남도 순천시 모 카페에서 “5월이 되면, 1980년 5월 18일 조선대학교 운동장에서 자신이 직접 보고 들었던 계엄군의 성폭력과 피해자들의 비명이 유독 심해진다”고 토로했다.
A 씨는 “5월 18일 당시에 학원 수업 도중 시위대를 찾으러 온 계엄군에 의해 강제로 끌려 나갔다”며 “도착한 곳은 조선대 운동장이었는데 머리를 조금이라도 들면 금세 곤봉이 날아와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있었다. 그 상태에서 갑자기 날카로운 비명이 연이어 들렸다. 곁눈질로 보니 여러 명의 군인이 누가 봐도 10대인 여성의 가슴과 몸을 만졌다”고 말했다.
이어 “또 다른 군인은 20대로 보이는 여성을 향해 ‘구덩이를 파서 수류탄을 터트려 모두 묻어 버린다’고 연신 윽박지르며 추행했다”며 “그렇게 조선대 운동장에서 상무대로 다시 끌려갔는데, 남성은 하의만 입은 채로 조사받았다. 여성들은 제대로 옷을 못 갖춰 입었다. 조사와 수사 과정에서 남성과 여성을 가리지 않고 성적 수치심을 느끼게 하는 인권유린이 빈번했다”고 밝혔다.
A 씨가 조선대 운동장에서 상무대까지 경험한 내용은 결국 5·18 민주화운동(1980년 5월 18일에서 27일) 이후에도 계엄군과 경찰에 의해 성별 구분없이 성폭력이 있었다는 걸 나타낸다.
5·18민주화운동 이후에도 성폭력 발생
![김선옥 씨 [사진=정현혼 기자]](https://image.ajunews.com/content/image/2025/05/15/20250515160050218539.jpg)
지난달 28일 김선옥(66) 씨 “5·18 성폭력은 개인의 잘못이 아니라 국가 책임이다”며 “현재 관련법에 성폭력 부분은 미흡하다. 우린 관련자가 아니라 엄연한 피해자다"고 강조했다. [사진=정현환 기자]
‘5·18민주화운동 계엄군 등에 의한 성폭력 사건’ 보고서에 따르면, ‘도심진압작전’(1980년 5월 18일~21일) 과정에서 9건의 성폭력 사건이 발생했다. ‘외곽봉쇄작전’(5월 21일~26일)에선 3건, ‘광주 재진입작전’(5월 27일)과 이후 연행-구금-조사 등의 과정에서 6건의 성폭력이 저질러졌다.
하지만 김선옥 씨(66) 5·18민주화운동 이후에 조사 과정에서 성폭행을 당했다. 아주경제는 지난달 28일 그를 전라남도 광주 자택에서 만났다.
선옥 씨 5·18 민주화운동 당시 전남대 음악교육과 4학년이었다. 5월 22일 책을 사러 시내에 나갔다가 시신을 보고 전남도청 학생수습대책위원회로 활동했다. 상황실에서 출입증과 야간통행증 확인 등의 업무와 안내 방송을 했다. 5월 27일 새벽 3시경에 전남도청을 빠져나왔다.
아무일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7월 3일 교생 실습 중이던 학교에 갑자기 사복 차림의 수사관 3명에게 연행됐다. 도착한 곳은 옛 광주 상무대 영창이었다.
상무대에서 약 두 달 넘게 조사를 받으며 ‘얼굴이 반반하네’ 등의 성적인 모욕을 수차례 당했다. 남성 군인이 지켜보는 상황에서 화장실에서 용변을 보게해 큰 치욕을 느꼈다. 장기간의 구타와 고문이 이어졌다. 몸과 마음이 점차 무너졌다.
9월 4일 담당 수사관이 비빔밥을 사줬다. 이후 인근 여관으로 끌고 갔다. ‘이 사람 손 하나에 내 목숨이 왔다갔다 하겠다’ 생각에 제대로 저항할 수 없었다. 그렇게 김 씨는 대낮에 성폭행을 당했다. 이러한 피해 사실을 스스로 증명해 5·18 민주유공자 장해 12급을 인정받았다.

구타와 고문, 성폭행 후유증으로 힘들어하던 사이 한 남자를 만났다. 1981년 혼자 딸을 출산했다. 그때부터 오직 딸을 위해 살았다. 2001년 유방암을 발견하기 전까지 5·18을 기억 속에서 지웠다.
하지만 암이 계기가 됐다. 아픈 상황에서 5·18 사망자 소식을 접하고 '나는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을 느꼈다. 2006년부터 지금까지 계엄군에 의해 자행된 성폭력을 알리고 같은 피해자를 지원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
김 씨는 “5·18 성폭력은 개인의 잘못이 아니라 국가 책임이다”며 “현재 관련법에 성폭력 부분은 미흡한 실정이다. 관련자로 돼 있는데 우리는 엄연한 피해자다. 국가폭력으로 한 개인의 삶이 무너졌다. 국가가 외면하지 말고 책임져야 한다. 지금도 5월이 되면 그때 생각나는 후유증에 시달린다. 하지만 이젠 다른 피해자에게 용기를 주고 싶다"고 했다.
앞서 추미애 의원은 지난해 11월, 5·18 민주화운동 보상자 보상 등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을 대표 발의했다.
개정안의 핵심은 이렇다. 2023년 12월 '5·18 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가 5·18 당시 발생한 성폭력 피해에 국가 책임을 인정하는 진상규명보고서를 채택했으나, '신상규명 결정 통지서'를 보낸 것 외엔 현재까지 아무런 조치가 없기 때문이다. 또 현행법이 5·18 민주화운동 관련 성폭력 피해자를 '관련자'로 한정하고 있어서다. 피해보상금의 지급 근거나 기준도 분명하지 않아 앞으로 이를 제대로 하자는 취지다.
"45년 동안 5·18 성폭력 피해자들 방치돼"

김복희 씨(63)는 5·18 민주화운동 당시 전남도청 활동하다가 상무대로 연행돼 성폭력에 노출됐다. [사진=정현환 기자]
김선옥 씨만 5·18 이후 수사 과정에서 성폭력에 노출된 게 아니다. 김복희 씨(63)도 계엄군으로부터 성폭행을 당했다.
지난 6일 전라남도 광주 모 카페에서 만난 김 씨는 "1980년 5월 27일 도청 1층 상황실에서 곧바로 상무대로 연행됐다"며 "수사 도중에 수사관이 다짜고짜 옷을 올렸다. 상의를 올렸더니 안의 속옷까지 모두 들치고 바지까지 내리라고 명령했다. 엄연한 성추행이었다"고 말했다.
‘5·18민주화운동 계엄군 등에 의한 성폭력 사건’ 보고서에 따르면, 김 씨는 조사 과정에서 연이어 성폭력에 노출됐다. 화장실에서 몰래 따라온 군인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김 씨는 성폭력으로 그자리에서 혼절했다. 이후 광산 경찰서에서도 비슷한 인권 유린이 자행됐다. 15일 동안의 불법 구금. 김 씨는 스스로 계엄군의 성범죄를 증명해, 5·18 국가유공자 장해 12급(신경정신과 12급 12호)을 받았다.
현재 그는 5·18 민주화운동 성폭력 피해자 모임인 ‘열매’ 대표로, 선옥 씨는 회원으로 성폭력 피해 진상규명과 법 개정, 피해자 치유 등의 활동을 이끌고 있다.
김복희 씨는 “45년 동안 국가가 5·18 민주화운동으로 성폭력을 받은 피해자를 방치해 왔다”며 “지난해 11월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이 발의한 관련 법안이 계엄과 탄핵, 파면 등으로 잠자고 있다. 국가가 더 늦기 전에 책임져야 한다. 피해자들의 몸과 마음을 치유할 수 있는 제도 보완도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지금도 5·18 성폭력 피해를 드러내지 못하고 계신 분들이 있을 거로 생각한다”며 “국가폭력의 희생자인 5·18 성폭력 피해자들을 이제라도 국가가 보듬어줘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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