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고법이 이재명 대통령의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 파기환송심 기일을 '추후 지정'하며 사실상 재판을 무기한 연기했다. 명분은 헌법 제84조, 대통령 불소추특권이다. 그러나 그간 불소추특권은 '소추(訴追)'에만 국한된 것으로 해석돼 왔다. 재판은 기소 이후 절차다. 고법이 면죄부를 확대 해석한 것은 사법부 스스로 법치주의의 근간을 허문 일이다.
법원은 이번 결정을 "헌법 84조에 따른 것"이라고 했지만 이는 명백한 정치적 해석이다. 헌법 어느 규정에도 재판 중단을 명시한 바 없다. 불소추특권은 기소(소추)를 막을 뿐이지 이미 기소된 사건의 재판까지 멈추라는 뜻은 아니다. 고법의 이번 판단은 결국 '현직 대통령은 어떤 혐의로 기소되더라도 임기 내에 재판받지 않아도 된다'는 위험한 선례를 남긴 셈이다.
이것이야말로 범여권이 원하던 그림이다. 서왕진 조국혁신당 원내대표를 비롯한 여권 정치인들이 최근 "정치적 안정을 위해 재판을 중단하자"고 요구했고 법원이 마치 이에 화답하듯 움직인 것이다. 서 대표의 발언은 마치 현재 수감 중인 조국 전 장관을 대통령 특사로 석방해 달라는 요구처럼 비치며 조국혁신당이 사실상 민주당의 2중대 역할을 자처하고 있다는 인식을 더욱 강하게 만든다. 이는 삼권분립을 무시한 정치-사법 간 유착의 결과로 볼 수밖에 없다.
사법부는 권력의 눈치를 보지 말아야 한다. 더 중요한 건 헌법과 증거 앞에 충실해야 한다. 대통령이든, 일반 시민이든 법 앞에 평등해야 한다는 원칙은 민주주의의 근간이다. 국민 누구도 법의 판단을 피하지 못한다. 그런데 선거법 위반이라는 중차대한 혐의로 기소된 대통령에게만 유독 '정치적 사정'을 고려해 예외를 둔다면 이는 곧 법치의 종말을 뜻한다.
이번 결정은 단순한 법 해석의 문제가 아니다. 과거 박근혜 전 대통령은 국정농단 사태로 헌정 사상 초유의 탄핵을 겪고도 이후 성실히 재판에 임하며 징역 22년형을 선고받고 수년간 복역했다. 박 전 대통령은 법적 책임을 정치적으로 해석하지 않았다. 노무현 전 대통령도 검찰 수사에 적극 응했고 법 앞에 겸허한 자세를 보였다. 결국 정치적 중압감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생을 마감했지만 그 과정에서 법을 피해가려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많은 국민에게 울림을 남겼다.
해외 사례는 더욱 뚜렷하다. 프랑스의 니콜라 사르코지 전 대통령은 재임 중 불법 자금 수수 의혹으로 기소돼 재판을 받았고 결국 징역형의 유죄 판결까지 받았다. 그는 재임 중이라는 이유로 '자신을 보호해 달라'고 요청한 적이 없었다. 브라질의 룰라 전 대통령 역시 대규모 부패 스캔들로 19개월간 수감생활을 했다. 이후 대법원이 절차상 문제를 이유로 유죄 판결을 무효화하면서 정치적 복권을 이뤘고 결국 대통령직에 복귀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모두 적법한 절차에 따라 법정에 섰다는 사실이다.
이재명 대통령도 떳떳하다면 오히려 누구보다 먼저 법정에 서서 결백을 입증하고 책임지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 그것이 국정의 신뢰를 높이는 길이다. 그러나 지금처럼 사법 절차를 '정치 안정'이라는 미명 아래 지연하고 회피하려 든다면 그 자체로 지도자의 자격을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문제는 사법부다. 사법의 독립성과 정치적 중립성을 스스로 훼손한 이번 결정은 향후 대한민국 사법 시스템 전체에 치명적인 불신을 초래할 것이다. 판사 한 명의 법 해석이 헌법 정신 전체를 뒤엎는 선례가 되어선 안 된다.
정치가 법 위에 군림해선 안 된다. 우리는 입헌민주국가이며 법은 권력의 이해에 따라 휘둘리는 도구가 아니다. 사법부는 지금이라도 헌법의 본질로 돌아가야 한다. 그리고 대통령은 법을 피하는 정치인이 아니라 법을 지키는 최고지도자가 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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