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교는 한 나라의 안전과 번영을 뒷받침할 수 있는 대외적인 여건을 조성하기 위한 노력이다. 지난 정부에서 이른바 ‘가치 외교’란 말이 있었는데 그런 말은 패권국이 자국 정책에 대해 동맹국 지지를 끌어내고자 할 때 쓰는 ‘외교적 수사’일 뿐이다. 한편 이재명 정부는 ‘국익 중심 실용 외교’를 추진하겠다고 하는데 이 말은 외교의 기본적 정의(定義)에 불과하다.
미·중 패권 경쟁이 격렬해지는 것은 미국의 절대적인 우위가 더는 작동하지 않은 결과이다. 최근 국제관계 추세는 신냉전의 도래라기보다는 다극 체제로의 전환이라고 하는 것이 적절하다. 우리 사회에서 ‘자주’를 외치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미국과 일본을 겨냥하고 있는데 주변국 모두에 대해 그러한 태도를 가져야 마땅하다. 중국을 중요시한 나머지 중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데 매몰되어 중국 의도에 대해 경계를 소홀히 하면 결국 과거 ‘종주국(?)의 귀환’이라는 참담한 결과를 맞이할지도 모른다. 러시아의 전략적 유용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한반도 문제와 관련하여 중국의 들러리에 불과하다고 보는 시각은 우리 스스로 외교의 선택지를 줄이는 것이다. 일본에 대해서는 감정적 접근을 이제는 어느 정도 정리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미국은 여전히 최강국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정책을 펴 나가야 할 것이다. 북한은 절대무기인 핵무기를 갖고 있는 체제이며, 이는 우리에게 실존적 위협임을 분명히 인식하는 것이 출발점이 되어야 할 것이다. 정권이 교체되어 새 정부가 출범한 시점에 주변 4강과 북한에 대한 바람직한 정책 기조를 제시해 보고자 한다.
미국을 서운하게 하지 말자
한국이 미국의 신뢰를 잃는다면 미국에 비협조적이라기보다는 정책이 시계추처럼 흔들리기 때문일 것이다. 외교정책이 오락가락하는 것은 그 나라가 내부적으로 ‘국익’에 대한 컨센서스가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 다른 문제는 한국이 이런저런 한계로 인해 미국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하더라도 심리적으로 과도하게 미국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숭미주의자들이 반미를 부추긴다는 말이 있다. 최근 새 대통령이 트럼프와 전화통화가 늦어졌다고 황당한 억측을 제기하며 소란을 피우는 행태를 보면서 미국에 대해 자존감이 전혀 없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한·미 간에는 관세, 방위비 분담 등은 물론이고 노무현 정부 때 논쟁이 있었던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등 심각한 의제들이 있다. 현실적으로 유사시 미국이 주한미군을 빼는 것을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정부는 미국 병력이 한국 영토에서 발진하는 것이 가져올 여파를 평소 미국 측에 충분히 설명하는 한편 대만해협 위기에 대해 우리가 미국보다 먼저 구체적인 입장을 내비치지 않는 것이 현명한 대책일 것이다.
현재 미국의 위상이 예전 같지 않지만 어쨌든 미국은 우리에게 필요한 나라이다. 한·미 관계 자체를 지나치게 중시하면서 한·미 관계가 좋아야 한다는 강박감을 갖는 것은 이제 지양해야 하겠으나 미국이 국제사회에서 직면한 여러 도전과 관련하여 ‘어려울 때 친구가 진정한 친구’라고 미국의 어려움을 외면하지는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
일본을 너무 미워하지 말자
그간 한국인들의 대일 인식은 피해자·가해자 관점이 주를 이루어 왔는데 이제 이를 극복할 때가 되었다고 본다. 한국은 최근 2년 연속 1인당 국민총소득(GNI)에서 일본을 추월하였고 미국 매체의 2025년 종합 국력 평가에서도 일본을 앞질러 세계 6위이다. 자존감을 충분히 회복한 우리가 계속해서 일본에 대해 ‘한풀이’하는 접근을 취한다면 결코 우리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한·일 관계가 과거에 발목 잡혀 있으면 결국 제3국에만 득이 될 뿐이다.
우리 사회의 일부는 일본을 비난할 때 ‘독일은 다르다’는 이야기를 덧붙이는데 뭘 모르는 소리이다. 독일은 유대인 학살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사죄해 왔으나 20세기 초 아프리카 나미비아에서 저지른 인종학살에 대해서는 사죄 요구에 대해 응대조차 하지 않다가 몇 년 전에야 마지못해 사과하였다. 우리 사회의 일부가 주장하는 일본의 진정한 사죄는 우리의 국력이 일본을 압도할 때 비로소 실현될 것이다. 진정 그런 날을 앞당기려면 ‘죽창가’를 부르기보다는 분노를 삭이고 뼈를 깎는 노력을 해야 한다.
이 점에서 문재인 정부처럼 감당하지도 못하면서 반일 감정을 부추기는 것은 비생산적이다. 그렇다고 윤석열 정부처럼 ‘중요한 것은 일본의 마음이다’며 넘어가는 것도 답이 아니다. 일본에 대한 정책은 미래를 지향하며 상생을 추구하는 것이어야 하겠다. 과거사 문제는 요란하게 떠들기보다는 우리가 적절히 카드로 활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우선 당장 6월 하순 이후 제주도 남쪽 7광구 대륙붕 공동 개발협정의 연장 여부가 정해지는데 일본이 어떤 결정을 하느냐에 따라 우리 국익이 영향을 받을 수 있다. 또한 현재 미국과 중국의 심각한 무역 전쟁 때문에 양국 모두 수출이 위협받고 있는 상황을 고려하면 FTA 논의 재개를 검토할 만하다. 양국을 합치면 미국·EU에 뒤지지 않는 초대형 시장이기 때문이다.
중국에 휘둘리지 말자
중국은 1992년 수교 이래 우리나라의 주요 수출시장이 되었으며 그 결과 오랜 기간 우리나라에서는 ‘안미경중(安美經中)’ 이야기를 하였다. 그런데 미·중 간 전략적 경쟁이 격화되면서 이제는 안미경미(安美經美)’ 또는 ‘안미경미중(安美經美中)’이라는 말이 나오고 있다. 중국은 또한 북한에 대한 영향력이 있을 것이라는 전제하에 안보 측면에서도 중요한 국가이다.
이제까지 우리의 대외관계가 미국 일변도이었던 데 대한 반발인지, 자존감을 회복하려는 의도에서인지 소위 ‘진보’ 정부들은 중국을 중요시하였는데 그 정도가 선을 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미국 일변도를 지양한다면서 중국에 대한 저자세 현상이 나타났다. 2017년 방중 때 문재인 대통령은 베이징대에서 ‘중국은 높은 산봉우리, 한국은 그 옆 작은 나라’라고 하였고 그럼에도 중국 측에서 홀대를 받았으며 사드 배치와 관련하여 외교·안보 당국자들이 보인 행태는 낯 뜨거운 것이었다. 최근에는 중국의 서해 잠정수역 불법적인 조치에 대해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소위 ‘보수’ 정부도 대중 관계를 잘 관리했다고는 할 수 없다. 양국 사이 연간 무역 규모가 2000억 달러를 넘고 상호 방문자 수가 수백만 명에 이르는데 정부 차원에서는 담을 쌓고 지내겠다는 식이었으며, 대만해협 사태에 대해 실속 없이 그리고 섣부르게 입장을 드러내었다.
객관적인 국력을 고려할 때 한국은 이제 중국에 대해 조선 왕조가 가졌던 것과 같은 인식이나 태도를 가질 이유가 전혀 없다. 그리고 중국은 현재 ‘중국몽’을 내걸며 최소한 동아시아에서는 패권국가가 되겠다는 의도를 갖고 있다. 한편 중국과의 교역은 물론 다양한 분야에서 교류는 우리 국익에 부합한다. 대중국 정책은 중국에 휘둘리지 않으면서 우리 국익을 구현하는 것이 정답이다.
러시아를 경시하지 말자
한국은 러시아와 수교한 이래 주로 북한을 염두에 두고 러시아를 바라보며 한·러 양자 관계 자체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2008년 이명박 대통령 방러 때 양국은 ‘전략적 동반자 관계'로 격상하기로 합의하였으나 그간 정부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 거의 없다. 그러다 보니 국제사회에서 러시아가 갖는 영향력을 과소평가하고 심지어 한반도 문제에 있어 러시아를 중국의 들러리 정도로 인식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한국은 경제적으로 재도약을 위해 중장기적으로 유라시아 대륙으로 진출을 꾀해야 하는데 이 지역의 핵심 국가가 러시아이다. 러시아는 우리가 하기에 따라서는 중국 시장에 대한 과도한 의존을 줄일 수 있는 거대한 시장이다. 또한 에너지 자원을 근거리에서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으며 수준 높은 원천기술을 보유하고 있어 한국이 4차 산업혁명에서 선도국이 되는 데 유용한 파트너가 될 수 있다. 요즈음 많이 이야기되고 있는 북극항로 개발도 양국 협력의 중요한 고리가 될 수 있다.
러시아는 한반도 주변국 가운데 남북한이 통일되면 가장 큰 실질적 이익을 볼 나라이다. 러시아의 국가적 숙원 사업인 철도·가스관·전력망 연결 그리고 극동시베리아 개발과 같은 메가 프로젝트는 적어도 남북한 관계가 안정되거나 통일이 되어야 본격적으로 추진될 수 있다. 이러한 프로젝트들은 한국이 동아시아 지역의 비즈니스 허브로 자리 잡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국제관계에서 우방의 적이 항상 우리의 적이 되는 것은 아니며 그럴 필요도 없다. 한국이 우크라이나 전쟁과 관련하여 서방 편을 들었고, 러시아가 북한에 도움을 청한 결과 북한군이 참전하여 현재 한·러 관계는 크게 위축되었으나 우리는 러시아의 유용성을 항상 염두에 두고 여건이 조성되는 대로 한·러 협력을 적극 모색할 필요가 있다.
북한에 대해서는 정교한 정책이 필요하다
북한 문제는 북한을 어떻게 보느냐가 첫 질문이다. 북한을 타도의 대상으로만 간주하는 것이나 갈라진 민족의 반쪽이라며 경계를 풀고 무조건 포용해야 한다는 주장 모두 올바른 접근이 아니고 국내적으로 갈등만 증폭시킬 뿐이다. 이제는 남북한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면 북한이 핵을 갖고 있고 과거처럼 주변국 개입이 필연적이기 때문에 한반도 전체가 초토화되고 민족의 절멸이라고 할 정도의 엄청난 피해가 예상되므로 평화를 우선시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북한의 위협에 철저히 대비하되 공연히 북한을 자극하는 것은 비생산적이다.
진보 정부가 들어섰으니 남북 정상회담을 언제 할 것이냐가 화두가 될 것이 분명하다. 역대 진보 정부에서 여러 차례 거창한 쇼를 벌여 일시적으로 온 국민의 마음을 들뜨게 하였는데 그런 일은 이제 되풀이되어서는 안 된다. 새 정부는 북한이 남한의 보수 정권이든 진보 정권이든 대북 정책의 표면적인 접근 방식이 다를 뿐이지 속으로는 모두 흡수 통일을 상정하고 있다고 인식하고 있음에 유의하여야 할 것이다.
남북 교류와 협력은 현재로서는 대북 제재가 있는 만큼 가능한 범위에서 추진하되 앞으로는 상호주의를 적용하고 철저하게 비즈니스 마인드를 기조로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리고 트럼프가 어떤 의도를 갖고 김정은과 대화를 추진하고 있는지는 예단하기 어려우나 그 자체에 대해 거부반응을 보일 필요는 없고 미국 측과 긴밀히 소통하면서 우리에게 유익한 결과가 도출되도록 하면 될 것이다.
필자 주요 이력
▷고려대 법대 법학과 ▷영국 옥스퍼드대 외교관 연수과정 수료 ▷주우즈베키스탄 공사 ▷ 주이르쿠츠크 총영사 ▷주러시아 공사 ▷상명대 글로벌지역학부 초빙교수 ▷현 유라시아전략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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