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본을 처음 읽고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사람들이 나에게 기대하는 이미지가 있겠지만, 이 역할은 그걸 뒤집어볼 수 있겠구나. 방향이 고정된 캐릭터가 아니라 관객이 계속 해석하고 의심하게 만드는 인물이라는 점이 흥미로웠어요. 그래서 더 끌렸던 것 같아요."
작품이 던지는 질문도 선택의 이유였다. 단순한 범죄 장르나 자극적인 복수가 아닌 '살아남는 방식'에 대한 이야기라는 점에서 공감과 해석의 여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분명했어요. 폭력 속에서 인간이 어떤 선택을 하게 되는가 같은 것들이요. 감독님도 그 부분을 정확하게 전달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었고 그게 느껴졌죠. 그래서 이 이야기 안에서 내가 어떤 방식으로 진소백이라는 사람을 연결할 수 있을까 고민했고 그 지점이 의미 있게 다가왔어요."
"진소백은 트라우마 이후 시간이 멈춰 버린 사람이에요. 마치 멈춘 벽시계처럼요. 겉으로 보기엔 규칙 없이 살고 감정도 단절된 것 같지만 그건 무너진 마음을 숨기고 버티는 방식이었을 거예요."
그의 말대로 진소백은 단순히 미스터리한 조력자가 아니라 조금씩 균열이 생기고 변화하는 과정을 담아내야 하는 인물이었다.
"소백은 누구도 자신의 경계 안에 들이지 않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은수와 희수를 만나면서 처음으로 그 경계가 흔들리기 시작해요. 트라우마를 가진 사람끼리는 서로 알아보잖아요. 그건 설명할 수 있는 감정은 아니지만, 이해되는 지점이 있었어요."
'당신이 죽였다'는 오쿠다 히데오의 소설 '나오미와 가나코'를 원작으로 한다. 극 중 가장 많은 각색을 거친 건 '진소백'으로 원작에서는 여성 캐릭터로 성별 반전을 겪게 됐다. 각색에서 오는 해석의 오해, 우려에 관해서도 이무생은 공감하고 있다며 조심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다만 누군가를 돕는 역할에서 성별이 중요한 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이 이야기 안에서 '도움'은 기능이 아니라 감정의 구조잖아요. 저는 소백이 여성을 구하는 남성이 아니라 같은 상처를 가진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손을 내미는 존재라고 이해했고 그게 핵심이라고 생각했어요."
결국 그가 집중한 건 완성된 캐릭터가 아니라 변화의 과정이었다. 규칙 없이 떠돌던 사람, 세상과 결이 맞지 않던 사람이 누군가의 존재로 인해 서서히 연결되는 경험이다.
"소백은 단단한 사람이라기보다는 은수와 희수를 만나 퍼즐처럼 맞춰져 가는 인물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제가 가져가야 할 감정은 설명이나 확신이 아니라 불안, 망설임 그리고 아주 작은 용기였죠."
외국어 연기는 이번 작품에서도 중요한 요소였다. 전작인 '시민 덕희', '노량' 등을 통해 외국어 연기를 경험해왔지만 이번에는 캐릭터의 정체성과 연결된 언어의 결을 더 고민해야 했다.
"결국 입에 붙이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었어요. 자다가도 치면 튀어나올 정도로요. 선생님이 녹음해준 발음을 계속 들으면서 입이 뇌를 대신하는 느낌으로 외웠어요. 이번엔 단순히 언어를 구사하는 문제가 아니라 소백이라는 인물의 정체성 안에서 언어를 어떻게 써야 하느냐가 더 어렵더라고요."
이무생은 대사를 직정 조정하기도 했다며 캐릭터를 위한 포인트로도 '언어'가 이용 되었다고 설명했다.
"은수가 중국어를 알아듣는 설정이 있었기 때문에 어느 순간엔 그게 더 날카롭게 닿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예를 들면 후반부에 은수가 변호사를 선임한 뒤 제가 '토달지 마'라고 하는 장면이 있는데, 그걸 한국어에서 중국어로 바꿨어요. 혼자 중얼거리는 장면이나 감정이 치밀어 오르는 순간엔 본국어가 튀어나오는 게 자연스럽잖아요. 그게 소백의 혼란과 정체성을 보여주는 장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캐릭터의 외형 또한 그가 집중한 지점이었다. 특히 긴 머리는 콘셉트가 아니라 하나의 해석이었다.
"감독님이 먼저 제안하셨어요. 처음엔 '나한테 어울릴까?' 싶었죠. 근데 의상 입고 세팅한 상태로 모니터를 보니까 딱 맞더라고요. 진소백이라는 인물과 가장 닮아 있는 키워드가 '오묘함', '모호함'이라고 생각했는데 긴 머리가 그 감정을 완전히 잡아줬어요. 그래서 그냥 가보자고 했죠. 결과적으로는 정말 좋은 선택이었던 것 같아요."
전소니, 이유미와의 호흡은 이번 작품을 통해 더욱 깊어졌다. 그는 진소백이라는 인물을 프리 단계에서 완성하기보다 현장에서 배우들과의 감정 교류 속에서 형태를 찾아가는 방식이 더 적합하다고 판단했다.
"진소백은 촘촘히 설계하기보다 여백이 있는 상태로 현장에서 숨 쉬어야 하는 캐릭터였어요. 그래서 첫 촬영은 설렘과 두려움이 동시에 있었어요. 그런데 전소니 배우가 은수로 들어오는 순간, 그 불안과 단단함이 한꺼번에 느껴졌어요. '아, 이게 내가 기다리던 느낌이구나' 싶었죠. 은수라는 존재가 진소백에게 들어오면서 어떤 감정을 흔들어주는데, 그걸 자연스럽게 만들어줘서 정말 고마웠어요. 은수로 있어준 게요."
올해로 데뷔 20주년을 맞았지만 그는 숫자에 의미를 두기보다는 '오늘의 연기'를 더 중요하게 바라본다.
"20년이라는 시간이 감사하지만, 그게 저를 특별하게 만드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이 큰 차이를 갖기보다는 지금 하는 일을 꾸준히, 성실하게 해내는 게 중요하다고 느껴요. 초심이나 사명감처럼 큰 말을 갖기보다, 편견 없이 작품과 캐릭터를 바라보는 태도가 배우로서 제일 중요한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앞으로도 연기 인생에서 특별한 전환점이나 목표를 두기보다 매 순간 진심을 채워가는 배우로 남고 싶다고 말했다.
"40주년이 오든, 또 다른 작품이 오든 그게 중요한 건 아닌 것 같아요. 그냥 한 걸음씩 걸어가는 게 중요하고, 그게 결국 쌓여서 제 길이 되는 거겠죠."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그는 짧은 문장으로 작품을 지켜준 시청자들에게 마음을 전했다.
"감사합니다. 이 작품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 그리고 은수와 희수처럼 살아내고 있는 현실의 수많은 분들에게 조금이라도 위로가 닿았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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