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과 여야 대표 오찬 회동이 무산된 일을 두고 한쪽은 초당 협력을 말해 놓고 중대 법안을 일방 처리한 여당의 독주를 문제 삼았고, 다른 한쪽은 대통령을 만나자고 먼저 제안해 놓고 1시간 전에 불참을 통보한 야당 대표의 비상식을 질타했다. 서로 다른 시각이지만, 그 밑바닥에는 공통된 불안이 흐른다. 신뢰가 무너졌다는 불안, 절차가 전략으로 대체되었다는 우려, 정치가 설득이 아니라 대치로 굳어지고 있다는 걱정이다. 이 상태로는 대한민국이 앞으로 나아가기 어렵다. 국가가 사는 길은 진보의 시각과 보수의 시각이 각자의 정당성을 외치는 데 있지 않고, 서로의 우려가 만나는 균형점을 찾아 국민이 납득할 수 있는 합의로 옮겨 가는 데 있다.
정치의 본령은 승리가 아니라 공존이며, 공존은 구호가 아니라 책임에서 시작된다. 내란죄의 엄중함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헌정 질서를 위협하는 범죄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가장 무겁게 다뤄져야 한다. 그러나 엄중함이 절차를 생략하는 면허가 될 수는 없다. 재판소원 도입과 대법관 증원처럼 사법 구조를 건드리는 법안은 내용의 옳고 그름과 별개로 과정 자체가 국가의 신뢰 자산이다. 위헌 우려가 제기되고 사법부 내부에서도 문제 제기가 이어진다면, 더욱 숙의와 토론을 선택하는 것이 상식이다.
속도를 이유로 밀어붙이는 개혁은 당장의 성과를 얻을 수 있을지 몰라도 오래가지 못한다. 정치의 기술은 상대를 꺾는 묘수가 아니라, 상대가 반대할 명분을 줄이는 설계다. 민주당이 진정 협치를 말한다면 쟁점 법안에 대해 충분한 공청회와 공개 토론을 거쳐 국민이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 다듬고, 회동을 제안했다면 그 전후의 입법 일정에서 상대가 받아들일 수 있는 여지를 남겨야 한다. 협치는 선언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절차를 존중하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장동혁 대표 체제의 국민의힘은 이제 과거의 이름을 반복하는 정치에서 벗어나야 한다. ‘윤 어게인’이 아니라 ‘국민 어게인’이어야 한다. 보수는 원래 차갑지 않았다. 책임과 절제를 기반으로 공동체를 안정시키고, 약자를 보호하며, 미래 세대를 준비하는 것이 보수의 본령이었다. 분노의 언어로 존재를 증명하려는 보수는 중도층의 신뢰를 얻기 어렵다.
따뜻한 보수, 책임지는 보수, 민생을 우선하는 보수로 돌아갈 때 비로소 국민은 다시 귀를 기울일 것이다. 동시에 정청래 대표 체제의 더불어민주당 역시 엄중함과 개혁의 당위성에만 기대어 속도를 내는 방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정치의 기술은 타협을 설계하는 능력이다. 상대를 굴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동의할 수 있는 지점을 찾아내는 지혜다.
대한민국이 서 있어야 할 균형점은 양 진영의 최대치가 아니라 국민의 최소치다. 국민이 최소한으로 요구하는 것은 거창하지 않다. 헌정 질서와 사법 구조를 건드리는 법안에는 숙의의 절차를 거치라는 것, 회동을 약속했다면 그 자리에서 싸우더라도 약속은 지키라는 것, 정쟁이 있더라도 민생 법안은 처리하라는 것이다.
이 세 가지는 진보의 가치도, 보수의 가치도 아니다. 공동체의 상식이다. 해외의 민주주의 국가들이 보여주는 교훈도 결국 같다. 갈등은 피할 수 없지만, 절차를 지키고 기록을 남기며 합의의 시간을 확보한다는 점이다. 절차가 무너지면 신뢰 비용이 폭증하고, 신뢰가 무너지면 경제와 외교, 사회 통합까지 연쇄적으로 흔들린다.
지금 대한민국 정치에 필요한 것은 더 큰 목소리가 아니라 더 단단한 기본이다. 쟁점 법안에는 냉각 기간을 두고 공개 토론을 의무화하며, 여야 대표 회동은 의제와 절차를 사전에 문서로 합의하고, 민생 법안은 정쟁과 분리해 초당적 처리 원칙을 세우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복잡한 이론이 아니다. 기본과 원칙, 상식의 문제다. 정치가 상대를 공격하는 기술에 머무를 때 국가는 정체한다. 그러나 정치가 신뢰를 회복하는 기술로 나아갈 때 국가는 다시 움직인다.
이제는 진영의 재등장이 아니라 국민의 재등장이어야 한다. 서로를 이기기 위한 정치가 아니라 함께 버티고 함께 나아가기 위한 정치로 돌아갈 때, 대한민국은 다시 균형을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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