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내용을 들여다보면 이번 선언은 여전히 조심스럽고, 동시에 불완전하다.
이번 선언의 핵심 메시지는 분명하다. AI는 인류 전체의 이익을 위해 발전해야 하며, 안전성과 신뢰성이 필수적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조항에는 ‘자발적’, ‘비구속적’이라는 단서가 붙는다. 법적 책임도, 이행 강제 장치도 없다.
이는 기술 패권 경쟁이 심화된 현실을 반영한다. 미국, 중국, 유럽, 인도 모두 AI를 미래 국가 경쟁력의 핵심으로 인식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스스로를 제약하는 규범에 쉽게 동의하기 어렵다. 그 결과 선언문은 가장 많은 국가가 동의할 수 있는 최소공약수에 머물렀다.
그러나 인도의 구상 역시 선언적 수준을 넘어서지는 못했다. 대규모 데이터센터 건설과 원전 연계 전력 공급, 2천억 달러 투자 유치 계획은 산업 전략으로 의미가 있지만, 글로벌 규범과 직접 연결되지는 않는다. ‘민주화’라는 구호가 실제 기술 접근권과 데이터 주권으로 이어질지는 아직 불확실하다.
이번 선언에서 가장 주목할 대목은 미국의 태도 변화다. 미국은 지난해 파리 회의에서는 공동선언문에 서명하지 않았다. 과도한 규제가 혁신을 저해할 수 있다는 이유였다.
이번 회의에서도 기본 입장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미국 대표단을 이끈 마이클 크라치오스 단장은 “우리는 AI의 글로벌 거버넌스를 전적으로 거부한다”고 공개적으로 밝혔다. 초국가적 규제 체제에 반대한다는 점을 분명히 한 것이다.
미국은 동시에 인도와 별도의 양자 AI 협력 선언을 체결했다. 이 선언에서 양국은 “기업가정신과 혁신에 우호적인 글로벌 접근법”을 추구하겠다고 밝혔다. 규범보다 시장 역동성을 중시하겠다는 메시지다.
그럼에도 미국은 최종 공동선언문에는 이름을 올렸다. 당초 발표가 하루 연기된 것도 서명국을 최대한 늘리기 위한 조정 때문이었다.
결국 미국의 이번 서명은 입장 전환이라기보다 전략적 참여에 가깝다. 논의에는 참여하되, 법적 구속에는 묶이지 않겠다는 계산이다. 참여는 하되 통제는 받지 않겠다는 태도다.
빅테크가 주도하는 질서
이번 정상회의에는 글로벌 AI 산업의 핵심 인사들이 대거 참석했다. 이는 오늘날 AI 질서에서 국가보다 기업의 영향력이 더 크다는 현실을 보여준다.
데이터, 인프라, 모델, 인재를 장악한 빅테크 기업들이 사실상의 규칙 제정자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이번 선언은 이들 기업에 대한 실질적 통제 장치를 거의 담지 못했다. ‘산업 주도의 자율 규제’라는 표현은 책임을 다시 기업에 넘기는 구조에 가깝다.
공공성과 시장 논리가 충돌하는 지점에서 국가의 역할은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그러나 이번 선언은 이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지 못했다.
선언문은 허위정보, 감시, 생물학적 위협, 일자리 감소, 에너지 소비 문제를 언급했다. 그러나 문제 인식과 정책 수단 사이에는 큰 간극이 있다.
AI로 인한 구조적 실업 가능성에 대해 ‘재교육’만을 해법으로 제시하는 것은 지나치게 낙관적이다. 데이터센터의 전력 소비 문제 역시 ‘효율성 제고’라는 원론적 표현에 머물렀다.
이번 회의 이후 유엔 산하 AI 과학 패널이 본격 가동된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사무총장은 ‘과학 기반 거버넌스’를 강조했다. 향후 AI 규범 논의의 중심축이 선진국 중심 클럽에서 유엔으로 이동할 가능성도 있다. 다만 유엔 특유의 느린 의사결정 구조가 빠르게 진화하는 AI 기술을 따라갈 수 있을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지금까지 한국의 AI 정책은 반도체 투자, 연구개발 지원, 스타트업 육성 등 개별 정책의 집합에 가까웠다. 그러나 AI 시대에 필요한 것은 단편적 지원이 아니라, 인프라·기술·에너지·데이터·제도를 하나로 묶는 통합 거버넌스다.
AI는 단순한 소프트웨어 산업이 아니다. 초대형 데이터센터, 반도체, 전력망, 통신망, 클라우드, 알고리즘, 인재, 법제도가 동시에 작동해야 하는 ‘국가 시스템 산업’이다. 어느 하나라도 취약하면 경쟁력은 유지될 수 없다.
한국은 이 점에서 드문 조건을 갖춘 나라다. 세계 최고 수준의 반도체 기술, 촘촘한 통신 인프라, 안정적인 전력망, 높은 디지털 수용성, 강력한 행정 역량을 동시에 보유하고 있다. 문제는 이를 하나의 전략으로 엮어내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부처별 정책과 단기 예산 중심 구조로는 글로벌 경쟁에서 주도권을 확보하기 어렵다.
이제 한국은 해외 규범을 뒤따라가는 수동적 참여국에서 벗어나야 한다. 인프라 구축, 에너지 전략, 데이터 활용 기준, 알고리즘 책임 체계, 노동 전환 정책까지 연결한 ‘한국형 AI 거버넌스 모델’을 먼저 제시해야 한다.
기술 경쟁에만 매달리는 추격자가 아니라, 기술과 제도를 함께 설계하는 규칙 창출국으로 전환해야 한다. 인프라와 기술, 산업과 윤리, 성장과 안전을 동시에 묶는 통합 모델을 만들 수 있는 국가는 많지 않다. 이는 한국에 주어진 전략적 기회이기도 하다.
AI는 더 이상 산업 정책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국가 운영 방식의 문제이며, 민주주의의 지속 가능성과 직결된 문제다. 이번 뉴델리 선언은 인류가 AI 앞에서 여전히 망설이고 있음을 보여준다. 위험을 알면서도 이해관계 앞에서 한 발 더 나아가지 못하는 모습이다.
기술은 이미 국경을 넘어섰다. 이제 남은 것은 정치와 제도가 그 속도를 따라갈 수 있느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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