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이스라엘의 이란 공습으로 촉발된 중동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한국 석유와 석유화학 산업 공급망 취약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중동산 원유· 나프타에 과도하게 의존하고 대체 공급망 확보에 소홀했던 것이 국가 경제에 심대한 타격이 되어 돌아오고 있다.
원유의 중요성은 두 번 말할 필요가 없다. 원유에서 정제되는 휘발유, 등유(항공유), 경유, 나프타가 없으면 국가 교통· 물류가 순식간에 마비되고 현대 문명은 삽시간에 붕괴될 것이다.
일반인에겐 생소한 나프타의 중요성도 이번 전쟁을 통해 확실하게 각인됐다. 비닐과 플라스틱의 원재료인 나프타가 없으면 식품· 의료 산업에서 포장재 대란을 피할 수 없다. 나프타 부족으로 합성 섬유에 필수인 파라자일렌(PX) 공급이 끊길 것이란 우려가 나오면서 세계 최대 스포츠 의류 업체인 나이키의 주가는 20%가량 폭락하기도 했다.
이미 벌어진 사태를 놓고 이제 와서 '누구 탓이다' 공방을 펼치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지금은 민관이 합심해 국가의 위기를 헤쳐나가는 데 집중할 때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라는 비판이 나올 수 있지만, 외양간은 당연히 고치는 게 순리다. 머나먼 중동에서 일어난 전쟁과 해협 봉쇄로 국가 경제가 마비되는 일은 앞으로 절대 없어야 한다. 전쟁이 끝나도 원유· 나프타 공급망 다변화를 국가 주요 시책으로 지속해서 추진해야 하는 이유다.
공급망 탈중동의 대표적인 사례로는 LNG를 꼽을 수 있다. 셰일가스 혁명 이후 민간 에너지 업체들은 미국· 호주· 동남아 등으로 LNG 공급망을 다변화했다. 그 덕에 한때 세계 최대 LNG 공급처였던 카타르의 LNG 설비가 전쟁으로 가동을 멈췄음에도 한국 기업들은 별다른 타격을 입지 않았다. 관성적으로 카타르산 LNG를 수급하다가 타격을 입은 한국가스공사 사례와 대조적이다.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은 언론사와 인터뷰를 통해 “전쟁이 끝나더라도 미국 등 비중동산 원유 도입을 확대하고 수송 루트를 다원화하는 작업을 멈추지 않고 밀어붙일 계획”이라고 밝혔다. 옳은 결정이고 진심으로 응원한다.
다만 중요한 것은 말이 아니라 구체적인 실천 계획에 있다. 유전 개발, 석유 시추 등 업스트림과 원유 수입·정제 등 다운스트림을 모두 수행하는 해외 석유 메이저와 달리 국내 석유산업은 업스트림을 맡은 한국석유공사와 다운스트림 사업을 영위하는 정유 4사(SK이노베이션, GS칼텍스, 에쓰오일, HD현대오일뱅크)로 나뉘어 있다.
원유 수입의 주체인 정유 4사 공급망에서 중동 비중이 높은 것은 회사의 태생 및 사업 구조와 근본적인 연관이 있다. 에쓰오일은 세계 최대 메이저인 사우디아라비아 아람코의 자회사고, HD현대오일뱅크의 주주 구성에도 아람코가 2대 주주로 이름을 올리고 있다. SK이노베이션은 SK그룹과 사우디 정부의 긴밀한 협력관계에서 시작된 회사다.
중동산 원유 중심의 민간 회사 사업 구조에 정부가 '감 놔라 배 놔라' 간섭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한국석유공사가 미국산 셰일오일 수입 주체가 되는 것도 시장교란 행위에 불과하다. 정유 3사가 미국 등으로 공급망을 다변화할 수 있도록 관련 수입 관세를 낮추는 형태로 정책을 펼치는 게 바람직하다.
원유는 미국산 수입 확대라는 해법이 있지만 나프타는 현재 뾰족한 해법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원래 국내 석화 기업들의 핵심 나프타 수급처는 러시아였다. 하지만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 미국·유럽 등의 경제 제재가 시작되고 러시아산 나프타 수입이 막히면서 중동산 나프타가 대안으로 급격히 부상했다가 호르무즈 해협 봉쇄의 직격탄을 맞았다.
러시아와 중동을 제외하고 나프타를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 국가로는 알제리와 인도를 꼽을 수 있다. 하지만 알제리는 프랑스의 영향력이 약화된 틈을 타서 중국이 일대일로 등을 통해 영향력을 강화했고, 이에 알제리산 나프타도 대부분 세계 최대 석화 기업인 중국 시노펙으로 공급되고 있는 상황이다. 인도산 나프타는 정제 전 원유에 러시아산이 대거 포함되어 있어 간접 제재에 위배될 공산이 큰 문제가 있다.
민간 기업이 나프타 대신 미국산 LNG에서 정제된 에탄을 활용하는 에탄분해설비(ECC)로 전환할 수 있도록 정부가 지원하는 정책도 충분히 고려해 볼 만하다. 미국산 LNG 가격이 떨어지는 하절기에는 충분히 경제성이 있다. 하지만 순도 95% 이상의 미국산 에탄은 법령에 화학 물질로 규정돼 있어 석화 업체가 보유한 부두에서 하역을 못하는 등 낡은 규제가 기업 발목을 잡고 있는 게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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