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진의 자투리 리뷰] 60년에 걸쳐 진화한 '좀비'는 '신인류'가 되는가.

  • 흐느적거리는 시체에서 무리를 이루는 리더가 되기까지, 진화하는 좀비

로버트 네빌은 이 땅의 신인류를 내다보았다. 그는 처음부터 그들에게 속할 수 없는 존재였다. 그 역시 파괴돼야 할 아나테마(저주)이자 검은 공포였다. 죽음 속에서 태어난 새로운 공포. 이제 나는 전설이야.

1954년 리처드 매드슨의 소설 ‘나는 전설이다’가 SF 소설계에서 위대한 고전으로서 대접을 받는 이유는 ‘나는 전설이야(I am Legend)’로 끝맺는 책의 마지막 문장 때문이다. 괴물(흡혈귀 내지는 좀비)은 악(惡), 이에 맞서 싸우는 최후의 인간은 선(善)이라는 확고한 사람들의 인식을 대번에 전복시키는 문장이다.
 
변이된 바이러스에 감염된 흡혈귀(혹은 좀비)는 ‘신인류’가 되어 새 역사를 열고 있었고, 최후의 인간 로버트 네빌은 ‘구인류’로서 신인류의 세상에 ‘악’이자 ‘공포’가 되어 있었다는 깨달음. 소설 ‘나는 전설이다’는 이 생각지도 못한 충격적 결말을 선보임으로써, 이후 나온 호러 소설·영화들의 기본 이야기 설정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원형’ 같은 작품이 되었다.
 
현대 좀비의 세계관을 사실상 처음 만들어낸 ‘원형’으로 대접받는 영화는, 1968년 조지 A. 로메로 감독의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이 꼽힌다. ‘좀비 영화’의 아버지격이다.
 
조지 A 로메로 감독의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1968 사진IMDB
조지 A. 로메로 감독의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1968) [사진=IMDB]
 
이 영화에서 초창기 좀비의 모습은 그저 옆마을 괴한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분장도 거의 돼 있지 않은 비교적 평범한 모습이다. 초저예산 영화인 탓이 크다. 게다가 어느 정도 부패가 진행된 시체가 살아난 것이라 느릿느릿 걸어다니는 탓에 주인공들은 이들 좀비를 꽤 손쉽게 처리하는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역사적인 최초의 현대적 좀비 영화로서 원초적인 스펙터클을 기대한다면 이 영화는 당연히 그 기대를 배신한다.
 
그러니까 태초의 좀비는 느리고, 약점이 많고, 비교적 처리가 손쉬운 존재로 출발했다. 죽음에서 살아나 시체가 걸어다녔으니 그것만으로도 공포의 대상이었지, 따지고 보면 물리적으로 퇴치가 어렵지는 않았다. ‘좀비물’이 호러영화로서 으스스한 공포감은 줄 수 있었을지 몰라도 ‘액션 영화’로서는 자질이 한참 부족한 시기였다.
 
어쨌든 로메로 감독은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 흥행 이후 좀비영화의 아버지로서 자부심을 갖고, 좀비영화뿐 아니라 적잖은 호러영화들을 만들었으나 큰 반응은 없었다. 좀비영화는 20세기가 다 지나가는 동안에도 철저한 마이너리티의 위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바탈리안(1985)’, ‘데드 얼라이브(1992)’ 등으로 근근히 이어지던 좀비영화의 명맥이 드디어 꽃을 피우는 때를 맞이하게 되니, 대니 보일 감독의 영화 ‘28일 후’가 2003년 세상에 나오면서부터다.
 
대니 보일 감독의 28일 후2003 사진20세기 폭스 코리아
대니 보일 감독의 '28일 후(2003)' [사진=20세기 폭스 코리아]
 
‘28일 후’는 그간 어기면 큰일 날 것 같았던 좀비의 법칙을 과감하게 깼다. ‘좀비’들은 시체가 아닌 ‘분노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들로, 좀비와 똑같이 인간을 물어뜯고 잘 죽지도 않지만 엄청난 아드레날린을 뿜으며 달릴 수 있는 능력을 탑재했다.
 
생전의 로메로 감독은 빨리 달리는 좀비에 대해 “그것은 좀비가 아니다. 좀비는 죽은 시체기 때문에 달릴 수 없다”라고 단호하게 못을 박았지만 관객은 ‘28일 후’에 열광했다. 중저예산으로 만들어진 이 영화는 제작비 대비 10배가 넘는 수익을 기록했고 이후 좀비 영화의 흐름을 완전히 바꿔버렸다.
 
시리즈의 지위를 갖고 2007년에 만들어진 ‘28주 후’의 좀비는 더 빠르다. 좀비의 달리기 속도가 너무 빨라, 숨이 다 넘어가도록 쫓기는 주인공의 처절한 모습만으로 이 영화는 호러영화인 동시에 액션영화로서도 충분한 역량을 뽐낸다.
 
‘28일 후’를 앞세운 빠른 좀비 영화들의 출현은 ‘좀비물’을 마이너에서 메이저로 끌어올린 가장 큰 원인이 됐다. 그럴듯한 설정을 가진 호러영화로서, 상업적으로 매력있는 액션영화로서 ‘좀비’는 그 쓸모를 보여주었다. 영화 ‘월드워 Z’, ‘나는 전설이다’, ‘레지던트 이블’, ‘부산행’ 등 메가히트작들이 그 증거다.
 
허나 빠르고, 괴력을 뽐내고, 집요하기 이를 데 없는 ‘좀비’의 진화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이제 좀비는 어느 정도 지능을 갖게 됨으로써 현 인류를 위협하는 ‘신인류’로 재평가 받는 단계에 이르렀다.
 
대니 보일 감독이 ‘28일 후’ 이후 22년만에 드디어 내놓은 ‘28년 후’는 다양한 좀비 ‘종(種)’이 등장한다. 28년 동안 좀비들이 생존하면서 다양한 종으로 분화된 것이다. 이 중 ‘알파’라는 개체가 있는데 좀비들의 리더격인 ‘알파’는 극단적 분노에 사로잡혀 아드레날린이 과다하게 분비돼 몸이 거대해졌다. 인간의 뼈와 살을 가뿐히 분리할 수 있는 근력을 가졌고 무리를 통솔할 정도의 지능을 갖췄다.
 
얼마 남지 않은 인간은 이 ‘알파’를 가장 무서워하고 마주치지 않으려고 조심하고 또 조심한다. 이 ‘알파’ 종족 중에서도 그야말로 비정상적으로 압도적 비주얼을 자랑하는 좀비가 등장하는데 이름은 ‘삼손’이다. 그를 지켜본 인간 ‘닥터 켈슨’이 지어준 이름이다.
 
영화 28년 후  뼈의 사원2026 사진소니 픽쳐스 코리아
영화 '28년 후 : 뼈의 사원(2026)' [사진=소니 픽쳐스 코리아]
 
1년 후 2026년에 연이어 공개된 ‘28년 후’의 2편 ‘뼈의 사원’에서는 ‘닥터 켈슨’과 ‘삼손’이 심지어 서로 교감을 하고 무려 ‘우정’도 쌓는다. 이 정도로 진화한 좀비가 등장하다니, 그야말로 드라마틱한 광폭의 진화다.
 
인간이었던 시절의 기억을 찾게 되면서 말까지 할 수 있게 된 ‘삼손’은 이후 어떤 식으로 이 세상에서 살아남게 될까. 이미 신체는 무시무시한 좀비로서 인간을 뛰어넘어버렸는데 지능까지 갖춘 좀비는 여전히 나약한 인간과 공존할 것인가, 인간을 지배할 것인가.
 
‘28년 후’ 2편까지의 이야기를 보면 진화된 좀비, 그러니까 ‘신인류’에 대한 두려움이 진하게 느껴진다. 동시에 타락한 인간의 잔인한 모습이 함께 펼쳐지면서 ‘신인류’와 ‘구인류’의 극단적인 대비가 더 공포스럽다. ‘구인류’는 이 세상에서 그 무엇보다 쓸모 없는 존재로 그려지기 때문이다.
 
곧 개봉될 연상호 감독의 ‘군체’ 역시 진화된 좀비를 다룬다. 정체불명의 감염사태로 좀비가 창궐하게 된 봉쇄된 건물 안에서 인간들은 예측할 수 없는 형태로 진화하는 좀비(감염자들)에 맞서 사투를 벌인다고 한다.
 
인류는 이제 구시대의 상징이 된 것일까. 영화나 책에 담긴 허구의 이야기 안에서는, 현실에 없는 미지의 ‘좀비’라는 존재에 빗대 낡은 인류문명의 위기를 간접적으로 맛만 보고 있다. 그렇지만 성큼 다가온 인공지능(AI)는 우리의 일상을 편하게 하는 시스템으로서 현재 활발하게 소비하고 있지만, 끝내 인류를 지배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동시에 갖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미 AI는 인간을 뛰어넘는 지능을 갖고 있음은 물론이고 광범위한 분야에서 인간의 판단을 대신하고 있다. ‘좀비’처럼 눈에 보이는 실체만 없을 뿐, 인간을 지배할 사실상 대부분의 조건을 갖춰나가고 있다.
 

문득 자신이야말로 비정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상이란 다수의 개념이자 다수를 위한 개념이다. 단 하나의 존재를 위한 개념이 될 수는 없다.

 
인류를 대신할 더 확장된 존재가 생겼다면 얼마든지 현재의 인류는 구시대의 공포로서 제거 대상이 될 여지가 있다. 그 두려움이 ‘좀비’처럼 이 세상 여기저기를 배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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