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수출이 다시 한번 역사의 문턱에 서 있다. 올해 연간 수출이 사상 처음으로 9000억 달러를 넘어설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다. 산업연구원은 최근 ‘2026년 하반기 경제·산업 전망’에서 올해 수출이 전년 대비 30.3% 증가한 9244억 달러에 이를 것으로 내다봤다. 무역수지 역시 2200억 달러 안팎의 사상 최대 흑자가 예상된다. 일부에서는 머지않아 ‘수출 1조 달러 시대’도 가능하다는 전망까지 나온다.
이는 분명 의미 있는 성과다. 세계 경제가 중동 전쟁 장기화와 고유가, 보호무역주의 확대, 미·중 기술 패권 경쟁이라는 복합 불확실성에 흔들리는 상황에서 나온 결과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수출은 여전히 한국 경제의 버팀목이며, 국가 경쟁력을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지표 가운데 하나다.
이번 수출 증가를 이끈 핵심 동력은 단연 반도체다. 인공지능(AI) 투자 경쟁이 본격화되면서 고대역폭메모리(HBM)와 AI 서버용 반도체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중심으로 한 한국 반도체 산업이 그 수혜를 누리고 있다. 산업연구원은 올해 반도체 수출 증가율이 100%를 넘어설 것으로 전망했다. 전체 수출에서 반도체가 차지하는 비중도 40% 안팎까지 확대될 것으로 분석된다.
세계 산업 질서가 AI 중심으로 재편되는 과정에서 한국 반도체 산업의 전략적 가치가 다시 높아지고 있다는 점은 긍정적이다. 미국 빅테크 기업들이 AI 데이터센터 구축 경쟁에 막대한 자금을 쏟아붓고 있고, 그 과정에서 한국 메모리 반도체에 대한 의존도 역시 높아지고 있다. 지금의 수출 호황은 단순한 경기 회복이 아니라 AI 산업혁명이라는 거대한 흐름과 맞물려 있다는 점에서 과거와 결이 다르다.
그러나 지금의 화려한 수출 성적표 상당 부분은 반도체에 의존하고 있다. 산업연구원조차 최근 수출 증가가 생산 물량 확대보다는 가격 상승 효과에 힘입은 측면이 작지 않다고 진단했다. 실제 D램과 낸드플래시 가격이 급등하면서 수출액이 크게 늘었지만, 이것이 곧 한국 산업 전체 경쟁력의 구조적 도약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지적도 나온다.
반도체 의존 경제의 위험성은 한국이 이미 여러 차례 경험했다. 반도체 업황이 좋을 때는 국가 경제 전체가 상승하지만, 업황이 꺾이면 성장률과 투자, 증시까지 동시에 흔들렸다. 지금처럼 특정 산업이 수출 증가분 대부분을 차지하는 구조는 장기적으로 건강하다고 보기 어렵다.
중요한 것은 수출 9244억 달러가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이후다. AI 반도체 경쟁력을 기반으로 제조업 전체를 고도화해야 한다. 로봇과 자율주행, 바이오, 에너지 인프라, 차세대 전력망, 방산, 스마트공장 등으로 산업 생태계를 확장해야 한다. AI 시대의 승자는 반도체를 잘 만드는 나라가 아니라 AI를 현실 산업 전반에 적용하는 나라가 될 가능성이 높다.
정부도 숫자에 안주해서는 안 된다. 연구개발 투자 확대와 규제 혁신, 전력 인프라 확충, 첨단 인재 육성에 더 과감하게 나서야 한다. AI 시대에는 반도체 경쟁력만으로 부족하다. 데이터와 전력, 인재와 소프트웨어 역량이 함께 뒷받침돼야 한다.
수출 1조 달러는 분명 자랑스러운 목표다. 그러나 그것은 종착역이 아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기록 경신의 환호가 아니라 다음 산업혁명을 준비하는 냉정한 전략이다. 반도체 슈퍼사이클은 기회다. 하지만 그 기회를 국가 경쟁력의 구조적 도약으로 연결하지 못한다면 지금의 호황 역시 언젠가는 지나가는 파도에 그칠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 경제가 진정으로 준비해야 할 것은 수출 1조 달러가 아니라 ‘반도체 이후의 대한민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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