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와 결별하기=도종환 지음, 한길사.
자연을 인간처럼 이해하고, 인간을 자연처럼 이해하는 시인 도종환의 산문집이다. 책장을 넘기다 보면 퍽퍽하게 갈라진 마음에 초록빛 비가 스며든다. 끓어오르는 주전자처럼 폭발할 것 같은 마음의 뚜껑을 열어 한김 식히게 하는 문장들이다.
저자는 살아오면서 “넌 이제 끝났어”라는 말을 여러 번 들었다고 한다. 교육 운동을 하다 감옥에 갔을 때도, 시인이 국회의원이 되었을 때도 그랬다. 그럼에도 그는 인생을 '길이 끝나는 곳에서 다시 시작되기를 반복하는 고행의 먼 길'로 받아들였다. 상처를 외면하거나 억누르지 않고, 자연의 초록처럼 운명을 겸허하게 받아들였다. 꽃이 지고 다시 피듯, 삶도 끝과 시작을 거듭하며 이어진다고 믿는다.
그는 다산 정약용의 말을 빌려 회복이란 상처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상처와 확실하게 결별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혐오를 부추기는 소음이 가득한 시대일수록, 마음속 상처를 직면하고 그것과 결별하는 용기, 그리고 다시 시작하는 힘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문학이 바로 그 힘을 줄 수 있다는 것.
책은 상실과 나이듦, 삶이 남기는 흔적을 두루 이야기한다. 생강나무꽃과 달맞이꽃 등 자연의 풍경을 통해 삶을 비춘다. 누가 눈길을 주든 주지 않든 때가 되면 다시 피는 생강나무꽃을 통해서는 인생의 거듭남을, 달맞이꽃과 나방을 통해서는 모두가 귀한 존재임을 일깨운다. 또한 한김 식힌 물이 좋은 녹차를 우려내듯, 고요 속에서 우러난 말로 서로를 너그러운 마음으로 품자고 권한다. 우리 역시 꽃처럼 아름다운 존재이니, 그 아름다운 얼굴과 표정, 마음을 세상에 환하게 드러내며 살아가자고 말한다.
"한세상 살다 가는 동안 아픈 흔적을 남기는 일도 있을 겁니다. 부끄러운 자국을 찍기도 할 겁니다. 씻을 수 없는 원한을 남기는 경우도 있을 겁니다. 그게 업으로 쌓여 윤회를 반복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불안해집니다. 우리 모두는 흔적을 남길까요? 물론 남길 겁니다. 어떤 흔적을 남길까요? 그 생각을 하면 두려워집니다." (93쪽)
햇생강이 나오면=강우근 외 22인 지음, 박준 외 엮음, 창비.
지금 한국시의 가장 신선한 목소리들을 한 권에 담은 앤솔러지 시집이다. <창작과 비평> 창간 60주년을 맞아 등단 10년 이하 시인 23명의 작품을 두 편씩 묶었다. 김보나, 유선혜, 임유영, 주민현, 한여진 등 현재 시단에서 가장 맹렬하게 진동하는 시인들의 작품이다. 박준, 안희연, 황인찬 시인과 송종원 평론가는 각 작품 뒤에 '다음 독자에게'라는 짧은 산문을 통해 시와 독자 사이의 문턱을 낮춘다.
제목은 남현지 시인의 시 '햇' 첫 구절에서 가져왔다. 이제 막 땅을 뚫고 올라온 햇생강처럼 이 책의 시들은 알싸한 맛으로 익숙한 감각을 흔들고 무뎌진 마음을 깨운다. 특히 시를 어렵게 느끼는 독자에게도 좋은 출발점이다. 23개의 서로 다른 목소리를 오가며 자신의 취향을 발견할 수 있다. 또한 작품 뒤에 실린 '다음 독자에게'는 해설보다 시를 사랑한 독자가 건네는 편지에 가깝다. 어느 문장 앞에서 오래 머물면 좋을지, 어떤 감정이 숨어 있는지를 귀띔해준다.
"이제 막 땅을 뚫고 돋아난 풋풋한 싹. 흙을 툭툭 털어내고 한 입 베어 물었을 때 입안에 퍼지는, 마냥 달콤하지만은 않은 그 알알한 맛. 우리는 스물세명의 젊은 시인이 직조해낸 문장들 속에서 바로 그 '햇생강'의 알싸함을 맛보았습니다. (중략) 때로는 뾰족한 언어로 일상의 권태를 찌르고, 때로는 서늘한 블랙 코미디로 우리가 처한 현실의 아이러니를 비틉니다. 하지만 그 매콤한 토로의 끝에는 묘하게 코끝을 찡하게 만드는 향긋함과 낡은 감각을 일깨우는 전환적인 에너지가 남습니다." (5~6쪽)
여름의 시 <포옹이 풀어지는 계절>은 아침달 시집 1번부터 55번까지 가운데 22권의 시집에서 여름의 정취가 풍부하게 담긴 시들을 엄선해 새 배열로 재수록했다. 김소연, 김언, 김영미, 심보선, 오은, 유계영, 유희경 등 스무 명의 시인이 여름 풍경을 여러 갈래의 길로 펼쳤다.
"햇빛이 몰려온다 점점 넓어지는 햇빛의 아가리가 풀밭을 집어삼킨다 우리는 햇빛 주위로 밀려나면서 조금씩 걸을 곳을 잃어가면서
시원한 곳으로 가자
멀리멀리 전진한다" ('바깥 산책'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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