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화점이 미술관을 닮아가고 있다. 화장품과 명품이 차지하던 핵심 공간에는 회화와 공예 작품이 들어오고, 옥상 정원과 매장 복도도 전시장으로 바뀌었다.
고객은 상품을 사지 않아도 작품을 보고, 향기를 맡고, 사진을 찍으며 백화점 안에서 시간을 보낸다. 온라인으로 물건을 주문하는 일이 일상이 되자 오프라인 점포가 ‘무엇을 파느냐’ 못지않게 ‘무엇을 경험하게 하느냐’를 놓고 경쟁하는 모습이다.
25일 업계에 따르면 롯데백화점은 미술에 향기와 공간 경험을 더했다. 에비뉴엘 잠실점 아트홀에서 다음 달 2일까지 여는 ‘어반 심포니전’은 서울 도심에서 생활하는 현대인의 감정을 주제로 한 미디어·회화 전시다. 구기정 작가는 미디어 설치 작품을, 구지윤 작가는 추상 회화를 선보인다.
전시장에는 작품만 있는 것이 아니다. 롯데백화점이 국내에 들여온 니치 향수 브랜드 ‘리버티 뷰티’와 협업해 공간 전체에 여름을 연상시키는 향을 입혔다. 관람객이 작품을 눈으로 보는 데 그치지 않고 향기를 통해 전시의 분위기를 느끼도록 한 것이다.
본점 에비뉴엘에서는 다음 달 24일까지 동양화가 정유미와 서양화가 정인혜가 참여한 ‘마인드스케이프 가드너전’을 진행한다. 작품을 별도 전시실에 모아두지 않고 고객의 이동 동선 곳곳에 배치했다. 매장을 오가다 자연스럽게 그림을 마주하게 해 쇼핑 과정 자체를 전시 관람으로 바꾼 셈이다.
강남점의 프리미엄 편집숍 더콘란샵에서는 이탈리아 테이블웨어 브랜드 ‘지노리 1735’의 국내 첫 전시형 팝업도 열고 있다. 판매 상품을 진열하는 데서 벗어나 브랜드의 역사와 장인정신을 하나의 전시처럼 보여주는 방식이다. 롯데백화점은 미술 작품과 향기, 인테리어, 상품을 함께 묶어 감각적인 체험을 만드는 데 무게를 두고 있다.
신세계백화점은 갤러리와 건축 공간, 한국 전통문화를 결합하고 있다. 강남점은 최근 하우스 오브 신세계 중층(1M층)에 처음으로 독립형 갤러리를 열었다. 개관전으로 한국 단색화 1세대 작가 최명영의 개인전 ‘평면조건’을 선보이고 있다. 회화와 드로잉 18점뿐 아니라 1960~1970년대 초기 작업과 전시 포스터 등 아카이브 자료도 함께 공개한다. 평면조건은 오는 9월 9일까지 진행된다.
그동안 강남점은 명품과 미식 콘텐츠로 경쟁력을 키워왔다. 여기에 정식 갤러리를 더하면서 쇼핑과 식사, 예술 감상을 한 공간에서 해결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든 것이다. 11층 S가든에는 프리즘이 햇빛을 반사하는 ‘빛의 정원’을 조성해 가족과 연인이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했다.
서울 본점의 ‘더 헤리티지’는 건물 전체를 전시 공간처럼 활용한다. 4층 뮤지엄과 5층 중앙정원에서는 9월 13일까지 박선기 작가의 개인전 ‘더 오리진 오브 스페이스’를 연다. 탄화한 숯을 공중에 매달아 한옥의 뼈대를 형상화한 대형 설치 작품이 중심이다. 관람객은 작품을 멀리서 바라보는 대신 숯으로 만든 구조물 사이를 직접 걸으며 형태가 모이고 흩어지는 장면을 경험한다.
같은 공간에서는 한국 현대 백자의 대중화를 이끈 김익영 작가의 ‘백의 풍경’도 진행되고 있다. 대표 조형 작품과 생활 도자 70~80여 점을 무료로 볼 수 있다. 신세계는 사진과 미디어아트, 전승 공예, 도예 등 장르를 바꾸며 더 헤리티지를 명동의 문화 거점으로 키우고 있다.
현대백화점은 전문 전시 공간과 어린이 미술관, 공예 팝업을 함께 운영한다. 더현대 서울 6층 문화 공간 ‘알트원’에서는 오는 11월 3일까지 영국의 거리 예술가 뱅크시 특별전 ‘뱅크시, 스틸 히어’를 연다. 판화와 오브제 등 110여 점을 선보이는 유료 전시다.
판교점 현대어린이책미술관에서는 11월 1일까지 사진 전시 ‘사진 세계’를 진행한다. 국내외 작가 14명의 사진과 아트프린트 110여 점을 통해 사진을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새로운 이야기를 만드는 매체로 소개한다. 어린이가 사진과 글을 연결하거나 직접 배경과 소품을 꾸며 촬영하는 체험 프로그램도 마련했다.
신촌점에서는 국내 공예 작가 5명의 작품을 전시하고 판매하는 ‘소연회’ 팝업을 선보였다. 윤상요 작가의 바둑잔부터 주진형 작가의 조각 작품, 수십만원대 도자기까지 다양한 가격대의 공예품을 한자리에 모았다. 갤러리를 따로 찾지 않아도 쇼핑 동선 안에서 작가의 작품을 보고 구매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백화점 3사, 서로 다른 ‘예술 셈법’
백화점 3사의 방향은 조금씩 다르다. 롯데는 향기와 미디어, 인테리어를 결합해 오감을 자극하는 전시에 집중한다. 현대는 전문 전시 공간과 어린이 미술관, 공예 판매를 통해 고객층별 콘텐츠를 세분화한다. 신세계는 정식 갤러리와 건축, 공예·한복 등 한국 문화 콘텐츠를 앞세운다.
공통점은 백화점이 상품 판매만으로 고객을 오래 붙잡기 어렵다고 판단했다는 데 있다. 온라인에서는 가격을 비교하고 물건을 주문하는 데 몇 분이면 충분하다. 백화점은 고객이 일부러 찾아와 머물 이유를 만들어야 한다. 전시는 새로운 방문 동기를 만들고 식사와 쇼핑, 굿즈 구매로 이어지는 동선을 넓힐 수 있다.
물론 미술 전시가 곧바로 매출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무료 전시를 보고 돌아가는 고객도 많다. 하지만 백화점 입장에서는 점포를 기억하게 하는 이미지를 만들 수 있다. 어느 백화점에서 무엇을 샀는지보다 어떤 작품을 봤고, 어떤 공간에서 사진을 찍었는지가 재방문의 이유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업계 관계자는 “과거 백화점 문화센터가 쇼핑을 보완하는 부대시설이었다면 지금의 갤러리와 전시는 고객을 점포로 불러들이는 콘텐츠가 됐다”며 “전시를 보러 온 고객이 식사와 쇼핑으로 동선을 넓히면서 체류시간이 늘고, 이는 점포 이미지와 매출을 함께 끌어올리는 효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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