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자흐스탄 수도 아스타나를 걷다 보면 한국인에게는 낯선 도시에서 뜻밖의 익숙함을 느끼는 순간이 있다.
거리에서 스쳐 지나가는 검은 머리와 익숙한 얼굴선, 나이 든 사람을 대하는 몸짓까지. 한반도에서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중앙아시아라는 사실을 잠시 잊게 할 만큼 낯익은 장면들이 곳곳에 있다.
식탁에 앉으면 그 익숙함은 더 선명해진다.
젊은 사람들은 어른이 먼저 먹기를 기다린다. 가족의 뿌리를 중요하게 여기고 부모는 자녀가 성인이 된 뒤에도 큰 존재로 남는다.
그런데 가장 닮아 보이는 가족문화 안에 정반대의 전통 하나가 숨어 있다.
한국에서는 오랫동안 장남이 부모를 모시고 집안을 잇는 책임을 맡았다.
카자흐스탄에서는 그 역할이 막내아들에게 돌아갔다.
“막내아들이 부모를 돌보는 전통이 있어요.”
아스타나에서 만난 직장인 아루잔 알림(22)은 이렇게 말했다.
알림에게는 언니 한 명과 남동생 한 명이 있다. 부모는 막내인 남동생에게 조금 더 관대한 편이라고 했다.
이유가 있다.
전통적으로 형들이 결혼해 집을 떠난 뒤 마지막까지 부모 곁에 남아 집을 지키고 노부모를 돌보는 사람이 막내아들이었기 때문이다.
한국 가족은 정반대의 순서에서 비슷한 답을 만들어냈다.
장남은 집안의 대를 잇고 제사를 주관하며 부모 부양에 더 큰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인식이 오랫동안 이어졌다.
책임을 떠맡은 아들은 달랐다.
그러나 가족 가운데 누군가는 다른 형제자매보다 원래의 집에 더 단단히 묶여 있어야 한다는 생각은 닮아 있었다.
아스타나에서 느끼는 이런 친숙함을 더 먼 역사에서 찾으려는 시도도 있었다. 중앙아시아의 하늘신 ‘텡그리(Tengri)’와 단군을 연결하거나, 카자흐어로 ‘수도’를 뜻하는 ‘아스타나(Astana)’와 단군신화 속 아사달의 발음에서 공통 기원을 찾으려는 해석이다.
그러나 이는 확립된 언어학적 계보가 아니다.
두 문화를 더 분명하게 비교할 수 있는 곳은 먼 신화보다 지금도 두 사회의 일상에 남아 있는 가족이다.
▲카자흐스탄은 왜 막내였나
카자흐 전통사회에서 부모가 살던 집은 단순한 부동산이 아니었다.
‘카라 샤니락(qara shanyraq)’이라 불리는 조상의 집은 가족의 중심이자 세대를 이어주는 공간이었다.
아들들은 성장해 결혼하면 차례로 부모 곁을 떠나 자신의 집을 꾸렸다. 가장 늦게까지 남는 사람은 막내아들, ‘켄제(kenzhe)’였다.
막내는 부모와 가장 오래 살았고, 자연스럽게 부모의 집과 노년의 부모를 돌보는 책임을 함께 이어받았다.
그렇다고 집이 막내 개인의 공간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형제자매와 친척이 언제든 돌아올 수 있는 ‘가족의 집’이라는 의미는 남았다.
알림은 “아들들이 결혼하면 하나씩 집을 나갔고 막내아들이 부모와 가장 오래 함께 살았다”며 “결국 막내가 부모의 집과 함께 부모를 돌보는 책임도 맡았다”고 설명했다.
이 전통은 지금도 상당한 지지를 받는다.
카자흐스탄 공공개발연구소가 2023년 24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 관련 문항에 응답한 카자흐계 1721명 가운데 77.3%는 ‘아들 한 명, 보통 막내아들이 부모와 함께 살아야 한다’는 전통에 긍정적으로 답했다.
18~28세에서도 73.6%가 긍정적이거나 어느 정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61세 이상에서는 84.4%였다.
아스타나의 긍정 응답도 68.8%에 달했다.
▲한국은 장남을 택했다
한국에서 장남의 위치는 아주 오래전부터 변하지 않은 전통처럼 보이지만 처음부터 지금과 같은 모습은 아니었다.
조선 전기에는 아들과 딸에게 비교적 고르게 재산을 나누고 제사도 자녀들이 돌아가며 맡는 사례가 있었다.
성리학적 가족질서가 자리 잡으면서 부계 중심의 원리가 강해졌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장남은 집안의 대를 잇는 사람으로 더 큰 권한과 책임을 갖게 됐다. 제사를 맡고 조상과 관련된 재산을 우선적으로 이어받는 경우도 늘었다.
서울 서부에 사는 직장인 강명조(35)에게도 그 흔적은 익숙하다.
“한국에서는 전통적으로 장남이 부모님을 돌보는 거죠.”
강씨는 지금도 장남에게는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부담이 있다고 했다.
다만 자신은 부모를 돌보는 일을 더 이상 ‘장남이기 때문에 해야 하는 의무’로만 생각하지 않는다.
“부모님이고, 저를 잘 키워주셨잖아요. 그걸 돌려드린다고 생각하면 제가 부모님을 돌보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
강씨는 부모에게 정기적으로 용돈을 드리고 가까운 곳에 살면서 자주 찾아가려고 한다.
한국의 장남과 카자흐스탄의 막내는 출발점이 달랐다.
한국의 장남은 계보의 앞자리를 이어받았기 때문에 집안의 중심이 됐다.
카자흐스탄의 막내는 형들이 떠난 뒤 마지막까지 부모 곁에 남았기 때문에 원래의 집을 지키는 사람이 됐다.
한국은 서열의 맨 위를 선택했고, 카자흐스탄은 집에 마지막까지 남은 아들을 선택했다.
▲식탁에서는 둘 다 나이가 보인다
두 문화가 다시 닮는 곳은 식탁이다.
강씨는 할아버지와 함께 식사할 때 누가 먼저 먹어야 하는지를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할아버지가 숟가락을 드실 때까지 기다려요. 그러고 나서 나머지 가족이 먹기 시작하죠.”
많은 유교적 의례가 사라진 지금도 한국에서는 익숙한 풍경이다.
알림 역시 바로 알아들었다.
“전통 음식을 먹을 때는 그 규칙을 지켜요. 어른이 먼저 드시지 않으면 저희도 먹지 않습니다.”
카자흐 식탁에서는 위계가 조금 다른 방식으로 드러난다.
전통 잔치에서는 삶은 양의 머리를 가장 연장자나 귀한 손님에게 올리고, 고기의 특정 부위를 나이와 친족관계, 지위에 따라 나누기도 한다.
한국에서는 누가 먼저 숟가락을 드느냐가 나이를 보여준다면 카자흐 전통 식탁에서는 어떤 부위를 받느냐가 사람의 위치를 드러낸다.
방식은 달라도 식탁이 가족 안의 질서를 보여주는 공간이라는 점은 닮았다.
▲“저희는 7대 조상까지 외워요”
카자흐 가족문화에서 조상의 의미는 더 먼 세대까지 이어진다.
알림은 아버지 쪽 조상을 7대까지 기억하는 ‘제티 아타(zheti ata)’를 모두 외울 수 있다고 했다.
“네. 전부 외울 수 있어요.”
단순히 이름을 기억하는 전통만은 아니다.
카자흐 사회에서는 전통적으로 부계 기준 7대 안에 같은 조상을 둔 사람끼리는 결혼하지 않았다.
유목사회에서 혈연관계를 정리하는 동시에 혼인이 가능한 범위를 가르는 기준이었다.
알림에게도 이 규칙은 여전히 의미가 있다.
사귀는 사람이 자신의 부계 7대 안에 들어가는 친척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묻자 답은 짧았다.
“헤어지고 각자 살아가야죠.”
한국에도 혈통을 기준으로 결혼을 제한하던 장치가 있었다.
성과 본관이 같은 남녀의 혼인을 금지했던 동성동본 제도다.
헌법재판소는 1997년 동성동본 금혼 규정에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고, 해당 제도는 2005년 민법에서 사라졌다. 현재는 법이 정한 일정 범위의 친족관계를 기준으로 혼인이 제한된다.
카자흐스탄의 7대 조상과 한국의 본관은 전혀 다른 체계다.
그러나 개인의 결혼을 가족의 혈통과 연결해 판단했다는 점에서는 닮은 흔적이 남아 있다.
▲의무였던 것이 선택으로
두 나라 가족문화에서 더 흥미로운 공통점은 오래된 규칙이 지금 동시에 느슨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알림은 전통 행사에서는 옛 규칙을 따르지만 일상은 훨씬 자유롭다고 말했다.
“전통 행사를 할 때는 따르는 편이에요. 하지만 편하게 만나거나 놀러 갈 때는 훨씬 자유롭죠.”
강씨가 말하는 한국도 비슷하다.
“부모님을 돌보는 문화는 아직 남아 있지만 많이 변하고 있어요. 제사를 지내지 않는 집도 많고, 자기 삶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늘어난 것 같아요.”
한국의 변화는 통계에서도 선명하다.
통계청 사회조사에서 노부모 부양을 가족이 책임져야 한다고 답한 비율은 2002년 70.7%에서 2024년 18.2%로 떨어졌다.
장남 책임에 대한 인식은 더 빠르게 약해졌다.
노부모 부양 책임이 장남에게 있다고 답한 비율은 2002년 15.1%에서 2018년 1.3%까지 낮아졌다.
가구 구조도 달라졌다.
2024년 한국 전체 가구의 36.1%가 1인 가구였고 서울에서는 39.9%에 달했다.
카자흐스탄에서도 변화가 진행되고 있다.
2021년 인구조사에서 확대가족은 약 156만 가구로 전체의 27.8%를 차지했다. 2009년 29.9%보다 비중이 낮아진 반면 핵가족 비중은 소폭 높아졌다.
빠르게 성장한 수도 아스타나는 여전히 가족 규모가 큰 편으로 확대가족 비중이 32.6%였다.
가족의 중요성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14~34세 2000명을 대상으로 한 전국 조사에서는 80.1%가 가족을 자신의 가장 중요한 가치로 꼽았다.
달라지는 것은 가족 안에서 ‘누가 무엇을 반드시 해야 하는가’에 대한 생각이다.
카자흐스탄은 막내아들과 카라 샤니락을 바라봤다.
한국은 장남과 부계의 대를 바라봤다.
책임을 맡은 아들은 달랐지만 태어난 순서가 한 사람의 역할을 상당 부분 정한다는 점에서는 닮아 있었다.
그러나 알림과 강씨가 말하는 가족은 그 이전 세대와 조금 다르다.
부모를 돌보는 일도, 오래된 의례를 지키는 일도 더 이상 태어나는 순간 자동으로 정해지는 의무만은 아니다.
전통은 남아 있다.
다만 한국에서는 장남의 몫이었던 책임이 형제자매에게 나뉘고, 카자흐스탄에서도 막내아들이 부모 곁에 남아야 한다는 규칙을 젊은 세대가 자신의 삶과 상황에 맞게 받아들이고 있다.
수천㎞ 떨어진 두 사회는 가족을 이어가는 방법부터 달랐다.
한국은 장남을 붙잡았고 카자흐스탄은 막내를 남겼다.
하지만 지금 두 나라의 젊은 세대가 향하는 방향은 의외로 비슷하다.
태어난 순서가 정해준 역할에서 조금씩 벗어나, 가족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 선택하는 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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