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경제학부를 나와 미국 시카고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도교수는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로버트 루카스였다. 그리고 서울대에서 경제학을 가르쳤다. 공부로 들 수 있는 보험은 다 들어놓은 셈이다. 그런데 보험 약관에 없던 경쟁자가 나타났다. AI( 인공지능)이다. 김세직 KDI(한국개발연구원) 원장의 이야기다. 김원장은 한국경제의 미래성장전략을 연구해온 경제학계의 석학이다.
김원장의 무기 가운데 하나는 어려운 수학을 푸는 능력이었다. 경제학에서는 좋은 생각도 수학 모형으로 증명하지 못하면 논문이 되기 어렵다. 그 증명을 해내는 것이 오랜 훈련으로 얻은 전문성이었다. 그런데 직접 하면 반나절 걸리던 수학모형 검산을 AI가 약 3분 만에 끝냈다. 모형의 기본 설정을 알려주면 풀이도 했다.
김 원장은 이것이 자신의 직업에 엄청난 위협이면서 기회라고 했다. 위협인 이유는 분명하다. 수십 년 걸려 익힌 기술이 몇 분짜리 작업이 됐다. 기회인 이유도 있다. 아이디어만 좋으면 "하루에 하나씩 페이퍼를 쓸 수 있는" 시대가 열렸다는 것이다. 논문의 품질은 여전히 검증해야 한다. 하지만 생각을 논문으로 옮기는 데 들던 시간과 기술의 벽은 크게 낮아졌다.
경제학의 언어로 바꾸면 이렇다. 흔해진 것은 값이 떨어지고, 귀해진 것은 값이 오른다. AI는 이미 알려진 방법을 실행하는 일을 흔하게 만들었다. 반대로 무엇을 연구할지, 어떤 문제를 풀지 정하는 능력은 더 귀해졌다. 서울대 교수에게 일어난 일은 교수만의 일이 아니다. 보고서를 쓰는 직장인, 시장을 분석하는 기획자, 투자결정을 하는 경영자, 정책을 만드는 공무원에게도 같은 변화가 오고 있다.
김 원장이 제시한 '모방형 인적자본'과 '창조형 인적자본'은 이 변화를 설명하는 틀이다. 모방형은 기존 지식과 기술을 배우고 활용하는 능력이다. 창조형은 새로운 아이디어를 스스로 생각해 내는 능력이다. AI가 값을 떨어뜨리는 쪽은 모방형이고, 값을 올리는 쪽은 창조형이다.
한 가지는 덧붙여야 한다. AI도 아이디어를 낸다. 열 개든 백 개든 요청하는 만큼 내놓는다.
그렇다면 사람에게 남는 일은 생각의 개수를 늘리는 것이 아니다. 무엇이 중요한 문제인지 고르고, 그럴듯한 제안 가운데 현실에 맞는 것을 가려내고, 실행해 결과에 책임지는 일이다. 필자는 창조형 역량을 '생각해 내고, 가려내고, 실현하는 힘'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전문성의 의미도 달라진다. 김 원장이 AI의 해답을 믿고 쓸 수 있는 것은 그 해답이 맞는지 알아볼 눈이 있어서다. 오랜 공부가 쓸모없어진 것이 아니다. 역할이 바뀌었을 뿐이다. 직접 계산하는 손에서, 질문하고 검토하는 눈으로 바뀐 것이다. 배운 것은 여전히 귀한 재료다. 달라진 것은 '그 재료로 무엇을 만드느냐'가 승부처가 됐다는 점이다.
문제는 우리 사회가 재료를 쌓는 데는 능숙하지만, 그것으로 새것을 만드는 훈련은 부족했다는 데 있다. 이유가 있다. 앞선 나라의 기술과 지식을 빨리 배워 따라잡는 것이 한국의 성장 공식이었기 때문이다.
학교는 정답을 빨리 찾는 학생에게 점수를 줬고, 회사는 선배의 업무 방식을 정확히 익힌 직원을 인정했다. 그 시절에는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그러나 따라잡기에 쓰던 능력을 이제 AI가 싼값에 제공한다. 같은 방식으로 같은 성과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바꿔야 할 곳은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이다. 사람은 구호가 아니라 평가 기준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이다.
학교에서는 시험평가를 바꿔야 한다. 정답을 맞혔는지와 함께 어떤 질문을 던졌는지, 자기 생각을 어떻게 설명했는지도 점수가 돼야 한다. 장난감 설명서대로 자동차를 조립한 아이에게 바퀴를 바꿔보거나 전혀 다른 쓰임을 궁리해볼 기회를 주는 것이다. 정답 없는 문제를 다뤄본 경험이 쌓여야 정답 없는 시대에 승자가 될 수 있다.
직장에서는 평가표와 승진 명단도 바꿔야 한다. "전례가 있나"를 확인하는 일은 필요하다. 그다음에 "지금도 맞는 방법인가"를 물어야 한다. 새 시도에는 부담만 돌아가고 관행을 따른 사람이 승진한다면 직원들은 도전하지 않는다.
경영자의 숙제는 더 무겁다. 삼성전자 사장이라면 AI로 비용을 줄이는 데서 더 나아가, 고객이 기꺼이 지갑을 열 새로운 제품과 서비스를 구상해야 한다. 경쟁사의 인기 제품을 따라가는 데 머물지 않고, 고객이 아직 말로 표현하지 못한 불편을 찾아 해결해야 한다. 작은 규모로 시험하고 반응을 보며 고치는 과정도 필요하다. 직원의 제안에서 가능성을 알아보고 사람과 돈을 투자하는 것이 사장의 일이다.
정치 지도자도 마찬가지다. AI는 해외 정책 사례 수십 개를 순식간에 정리해 줄 것이다. 그러나 그 가운데 무엇이 우리 현실에 맞는지, 목록에서 빠진 문제는 없는지 판단하는 일은 대통령과 장관, 국회의원의 몫이다. 국민을 설득하고 실행하고 결과에 책임지는 일은 AI에 맡길 수 없다. 높은 자리일수록 익숙한 답보다 새로운 답을 찾아야 한다.
김세직원장은 “AI만 생각하지 말고 HI도 꼭 생각하자.”고 강조했다.
HI는 휴먼 아이디어, 사람이 스스로 만들어내는 생각이다. AI 도입과 활용 교육에 쏟는 관심만큼 사람의 생각을 키우는 데 투자해야 한다.
학생은 시험지 앞에서, 직원은 업무과제 앞에서, 사장과 대통령은 결정의 자리에서 자기 생각을 꺼내야 한다. AI 시대의 경쟁력은 '얼마나 많이 배웠느냐'에서, '배운 것으로 무엇을 새로 만들어내느냐'로 옮겨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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