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맥주를 한국 공장에서 만든다. 하이트진로가 지난 12일 발표한 기린 ‘이치방시보리’의 국내 생산 계획이다. 첫해 생산량은 150만 리터. 500ml 캔으로 300만개에 해당한다. 2027년에는 한국에서 판매하는 '이치방시보리'의 75%를 국내 생산 제품으로 바꿀 방침이다. 기린이 자본 관계가 없는 아시아 기업에 생산기술을 제공하는 첫 사례라고 한다. 일본 맥주의 한국 진출이 수입과 유통을 넘어 제조로 확대되는 셈이다.
하이트진로가 내세운 이유는 신선도와 안정적인 공급이다. 일본에서 생산한 맥주가 통관을 거쳐 한국 시장에 유통되기까지 평균 한 달 반이 걸리지만, 국내에서 만들면 이를 1~2주로 줄일 수 있다는 설명이다. 기린의 효모를 공급받아 배양하고 맥아와 홉도 기린이 정한 원산지와 규격에 맞춘다. 생산 허가를 받기까지 1년 넘게 시험을 거쳤다. 한국에서 만들더라도 소비자가 기대하는 기린의 맛을 유지하는 것이 협력의 전제다.
이 발표는 일본 맥주의 판매 회복을 보여주는 소식이기도 하다. 한국무역협회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일본 맥주 수입량은 9만 7945톤으로 전년보다 16.5% 늘었다. 역대 최대 규모이자 수입 맥주 전체의 약 40%다. 국가·지역별로도 3년 연속 1위다. 하이트진로가 수입·판매해온 '이치방시보리' 역시 지난해 한국 매출이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
불과 몇 년 전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풍경이었다. 2019년 일본 제품 불매운동 당시 일본 맥주 수입은 급감했다. 기린은 편의점에 제품을 진열하는 데도 어려움을 겪었다. 일본 맥주가 수입 1위를 되찾은 것은 2023년이다. 아사히의 생맥주캔이 인기를 끌면서 회복에 힘을 보탰다. 일본 여행에서 접한 제품을 한국에서도 찾는 소비가 판매로 이어졌다.
삿포로가 지난해 서울 성수동에 문을 연 ‘삿포로 프리미엄 비어 스탠드’가 한 사례다. 생맥주 기기를 매일 세척하고 일본에서 들여온 맥주를 사흘간 냉각한다. 도쿄 본사에서 교육받은 한국인 직원들이 신선한 맥주 온도와 따르는 방법을 관리한다. 흐르는 물로 잔을 차갑게 만드는 방식도 적용했다. 소비자가 접하는 한 잔의 품질을 브랜드 관리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산토리도 비슷하다. ‘더 프리미엄 몰츠’를 취급하는 음식점 가운데 기구 세척과 맥주통 관리 등의 기준을 충족한 곳을 인증한다. 위스키 ‘가쿠빈’으로 만드는 하이볼은 맛과 매장의 영향력 등을 평가해 한국의 100개 점포를 ‘하이볼 명가’로 선정했다. 기준에 미달하면 교체할 수도 있다. 브랜드 이름을 내건 만큼 판매 현장의 품질까지 관여하겠다는 방식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일본 업체가 한국을 공략하는 대상이다. 맥주와 위스키라는 상품에 더해 온도, 잔, 탄산의 배합, 매장의 분위기까지 상품의 일부로 다룬다. 같은 술이라도 어디서 어떻게 마시느냐에 따라 경험이 달라진다는 점을 사업에 반영한 것이다. 음식점에서 맛을 익힌 소비자가 집에서도 같은 제품을 찾게 만드는 연결고리이기도 하다.
그 범위는 맥주 영역 밖으로 넓어지고 있다. 기린은 지난해 7월 한국에 캔 츄하이 ‘효케츠’를 출시했다. 산토리는 '가쿠빈'뿐 아니라 '짐빔 하이볼' 캔도 판매한다. 아사히 계열사는 지난해 서울에서 약 2주간 저알콜·무알콜 음료를 체험하는 바를 운영했다. 시장조사업체 유로모니터에 따르면 한국의 RTD(즉석음용음료) 시장은 수량 기준으로 2024년 규모가 2019년의 약 4배로 커졌다. 개봉해 바로 마시는 제품의 성장에 일본 업체들도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이를 두고 한국의 폭탄주 문화가 일본식 음주 문화로 바뀌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일본 맥주가 수입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과 한국 맥주 시장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구분해야 한다. 다만 소비자가 고를 수 있는 맛과 마시는 방식이 늘었고, 일본 업체들이 그 수요를 사업으로 연결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불매운동의 경험도 이들의 전략에 남아 있다. 아사히는 제품 포장에서 일본어 표기를 줄이고 한국어와 영어를 중심으로 바꿨다. 반면 삿포로는 겨울 한정 상품 ‘후유모노가타리’에 일본 한자 ‘冬物語’를 그대로 사용했다. 일본색을 줄이는 방식과 일본의 이미지를 살리는 방식이 함께 존재한다. 한국 소비자를 하나의 취향으로 묶기보다 브랜드와 상품에 따라 접근을 달리하는 모습이다.
하이트진로와 기린의 협력은 이런 현지화가 생산 단계까지 들어왔음을 보여준다. 하이트진로는 2004년 '이치방시보리' 병맥주 수입을 시작했고, 2011년에는 캔맥주와 생맥주를 포함한 독점 수입·판매 계약을 맺었다. 20여년간 이어진 거래가 기술과 품질을 함께 관리하는 제조 협력으로 발전했다. 한국에서 생산하는 일본 브랜드 맥주가 늘면 앞으로는 수입 통계만으로 그 브랜드의 한국 판매를 파악하기도 어려워진다.
이와같은 일본 맥주업체의 국내시장 공략법은 한국 기업도 참고할만하다. 해외에서 제품이 인기를 얻었을 때 수출 물량을 늘리는 것과 현지에서 오래 팔릴 여건을 만드는 것은 서로 다른 과제다. 소비자가 실제로 제품을 접하는 매장과 서비스, 품질까지 관리해야 재구매를 기대할 수 있다. 현지 기업과 쌓은 거래 관계를 생산 협력으로 발전시키는 데는 시간도 필요하다.
기린의 한국 생산은 아직 성과를 평가할 단계가 아니다. 계획한 물량이 팔릴지, 국내 생산 제품의 맛과 품질을 소비자가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지켜봐야 한다. 그러나 일본 맥주업체들이 한국 시장을 붙잡기 위해 들이는 노력은 이제 캔 안의 맥주를 넘어 공장과 매장까지 확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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