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자의 강암 송성용 선생 이야기|인간·문화·자연] 한 획에 인생을 담고, 한 낱말에 우주를 품다

  • 강암 송성용의 붓끝에서 전국 제자들의 묵향으로… 아들 송하진 전 전북도지사의 새로운 서예 인생까지, 세대를 이어가는 한국 서예의 정신

가을이 깊어가는 시월, 서울 인사동에서 특별한 서예전이 열린다. 전시의 이름은 ‘한 낱말 글씨전’이다. 꽃, 마음, 사랑, 시나브로. 우리가 날마다 사용하면서도 그 깊이를 미처 헤아리지 못했던 낱말들이 붓끝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는다. 긴 시도 아니고 장엄한 문장도 아니다. 단 하나의 낱말이다. 그러나 그 한 낱말에 한 사람의 인생이 있고, 한 민족의 문화가 있으며, 때로는 우주의 이치까지 깃든다.

재단법인 강암서예학술재단이 마련한 이번 전시는 10월 28일부터 11월 3일까지 서울 인사동 한국미술관에서, 11월 6일부터 12일까지 전주 전북특별자치도예술회관에서 이어진다. 전국 서예가들이 참여한 작품 117점 가운데 한글 작품이 85점, 한자 작품이 32점이다. 문자와 언어의 아름다움을 새롭게 발견하는 자리이면서 한국 서예의 전통이 어떻게 오늘의 문화로 살아나는지를 보여주는 뜻깊은 전시다.

우리는 이 전시에서 한 사람의 이름을 먼저 떠올린다. 강암(剛菴) 송성용(宋成鏞·1913~1999) 선생이다.

그는 글씨를 남긴 사람이면서 동시에 정신을 남긴 사람이다. 그 정신은 제자들에게 이어졌고, 제자들은 전국 각지에서 저마다의 예술세계를 일구었다. 이제 그의 아들 송하진 전 전북도지사까지 공직에서 물러난 뒤 다시 붓을 잡고 한글 서예의 새로운 길을 탐구하고 있다.

한 예술가의 정신이 사람에서 사람으로, 세대에서 세대로 흘러가는 것이다. 문화란 본래 그런 것이다. 한 사람의 재능으로 시작되지만 여러 사람의 사랑과 실천을 통해 비로소 역사가 된다.
 
사진국립현대미술관
강암 송성용 선생 [사진=국립현대미술관]
 
강암 송성용, 붓으로 인간의 품격을 세우다
강암은 1913년 전북 김제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호남의 유학자 유재 송기면이었다. 유학의 학문적 전통과 선비정신 속에서 성장한 강암에게 글씨는 단순한 필묵의 기술이 아니었다. 인간이 자신을 수양하고 세상을 대하는 태도를 드러내는 정신적 실천이었다.

서예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붓을 잘 움직이는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붓을 움직이기 전에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 일이다. 먹을 갈며 호흡을 고르고, 흰 종이 앞에서 마음을 비우며, 첫 획을 긋기까지 기다리는 시간은 서예가에게 일종의 자기 성찰이다.

붓은 거짓을 감추기 어렵다. 조급하면 선이 흔들리고, 지나치게 힘을 주면 획이 굳어진다. 반대로 힘을 지나치게 빼면 글씨는 중심을 잃는다. 강함과 부드러움, 움직임과 멈춤, 채움과 비움 사이에서 균형을 찾아야 한다.

강암이라는 호가 우리에게 던지는 물음도 여기에 있다. 진정한 강함은 무엇인가. 다른 사람을 누르는 힘인가, 아니면 자신을 지키는 절제와 원칙인가.

나는 후자라고 생각한다. 강암의 서예정신을 오늘의 언어로 읽는다면 그것은 굳센 정신과 유연한 표현의 조화다. 원칙은 단단하되 표현은 자유로워야 하고, 전통을 존중하되 새로운 창조를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

서예는 선의 예술이지만 동시에 인간의 품격을 묻는 예술이다. 글씨가 아름답다는 것은 단순히 모양이 보기 좋다는 뜻이 아니다. 오랜 수련과 성찰이 한 획에 응축되어 보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는 뜻이다.

강암이 남긴 유산의 가치를 작품의 숫자나 명성만으로 평가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는 서예를 통해 인간이 평생 무엇을 배우고 어떻게 자신을 다듬어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한다.
 
전국으로 뻗어간 제자들, 스승의 글씨를 넘어 자신의 세계로
위대한 스승의 가치는 얼마나 많은 제자를 길러냈느냐에만 있지 않다. 그 제자들이 얼마나 독립적인 예술가로 성장했느냐에 있다.

강암의 서예정신을 계승하는 후학과 서예인들은 전북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작품 활동과 교육, 전시를 통해 한국 서예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강암연묵회와 같은 서예인들의 교류와 활동 역시 이러한 계승의 한 흐름이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를 분명히 해야 한다. 스승의 글씨를 똑같이 쓰는 것이 반드시 훌륭한 계승은 아니다. 스승이 남긴 정신을 자신의 시대와 감각으로 새롭게 표현할 때 비로소 예술은 발전한다.

어떤 서예가는 전통 한문서예의 장중한 필법을 깊이 탐구하고, 어떤 이는 한글의 조형성을 발전시키며, 또 다른 이는 문자의 구조와 여백을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한다. 서로 다른 길을 걸어도 그 바탕에는 붓을 존중하고 글씨를 통해 자신을 수련한다는 공통의 정신이 있다.

이번 ‘한 낱말 글씨전’은 이러한 독창성이 드러날 수 있는 무대다. 긴 문장이나 유명한 시구에 의존하지 않고 단 하나의 낱말로 자신의 예술세계를 보여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글자의 의미는 같아도 필획의 속도와 굵기, 먹의 농담과 여백은 작가마다 다르다.

한 사람은 ‘꽃’을 힘찬 생명의 상징으로 쓸 수 있고, 다른 사람은 떨어지는 꽃잎의 쓸쓸함으로 표현할 수 있다. ‘마음’이라는 같은 낱말도 어떤 작가에게는 평온함이 되고 다른 작가에게는 격정이 될 수 있다.

이것이 서예의 창조성이다. 전통이 형식을 가르친다면 예술은 그 형식 안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발견하게 한다.

강암의 제자와 후학들이 전국 각지에서 저마다의 묵향을 피워내는 일은 한 그루의 큰 나무에서 새로운 숲이 자라나는 것과 같다. 스승의 그늘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그 뿌리에서 생명력을 얻어 각자의 하늘을 향해 자라는 것이다.
 
강암서예학술재단, 한 사람의 유산을 사회의 문화자산으로
강암의 정신을 오늘까지 이어오게 하는 중요한 토대가 강암서예학술재단이다. 1993년 설립된 재단은 2023년 창립 30주년을 맞았다. 강암의 유지를 받들어 서예문화를 진흥하고 서예인의 창작 의욕을 북돋우며 후진을 양성하는 데 힘써왔다.

1995년 문을 연 전주 강암서예관은 그 정신이 머무는 문화공간이다. 강암의 작품뿐 아니라 한국 서화사의 귀중한 자료를 보존하고 전시하며 후대에 전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강암서예대전 또한 새로운 서예 인재를 발굴하고 창작 활동을 장려하는 통로다.

재단의 역할은 단순히 한 예술가를 기념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 문화유산을 보존하는 동시에 그 유산이 오늘의 시민과 다음 세대의 삶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 끊임없이 질문해야 한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송현숙 이사장의 시도는 그런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장문의 고전이나 익숙한 서예 형식에서 벗어나 일상적인 한 낱말에 집중함으로써 서예와 대중 사이의 거리를 좁히려는 것이다.

‘한 낱말’이라는 발상은 단순하지만 결코 가볍지 않다. 오히려 짧기 때문에 더 깊은 성찰을 요구한다. 한 글자, 한 획의 차이가 작품 전체의 분위기를 바꾼다. 여백마저 작가의 표현이 된다.

재단이 앞으로 해야 할 일도 분명하다. 강암의 작품과 기록을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보존하는 동시에 제자와 후학들의 예술적 성취를 연결하고, 청소년들에게 서예를 가르치며, 한글 서예의 아름다움을 세계에 알리는 일이다.

문화유산은 소유하는 것보다 나누는 것이 중요하다. 보존만 하면 과거에 머물지만 교육하고 창조하면 미래가 된다.
 
아버지의 붓을 다시 잡은 아들, 송하진의 또 다른 인생
강암의 예술적 유산을 이야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그의 넷째 아들 송하진 전 전북도지사다.

송하진은 전주시장 8년, 전북도지사 8년 등 16년 동안 지방행정을 이끌었다. 그러나 그의 삶에는 공직자라는 이력과 더불어 서예가의 아들이라는 또 하나의 뿌리가 있다.

그는 공직에서 물러난 뒤 서예가로서 자신의 작품세계를 본격적으로 펼치고 있다. 2023년에는 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 조직위원장으로 선출돼 국제 서예 교류와 전북의 서예문화 발전을 위한 역할을 맡았다.

특히 2025년 10월에는 정부세종청사 박연문화관에서 ‘한글의 멋을 담은 K-서예, 푸른돌·취석 송하진 전’을 열어 60여 점의 한글 서예작품을 선보였다.
 
송하진 전 전북도지사 사진연합뉴스
송하진 전 전북도지사 [사진=연합뉴스]

이 사실은 여러 의미를 생각하게 한다.

정치와 행정의 세계에서 오랜 세월을 보낸 사람이 다시 붓을 잡는다는 것은 단순한 취미생활 이상의 의미를 가질 수 있다. 행정이 제도와 조직을 통해 사회를 움직이는 일이라면 서예는 한 사람의 내면을 가다듬고 자신의 정신을 표현하는 일이다.

물론 송하진의 작품은 그의 공직 경력이나 아버지의 명성과 별개로 예술적 성취에 따라 평가받아야 한다. 그럼에도 공직을 떠난 뒤 한글 서예를 자신의 새로운 활동 영역으로 삼고 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아버지가 남긴 붓을 그대로 모방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경험과 감각으로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가는 일이다. 강암의 유산을 계승한다는 것도 결국 이러한 독립적인 창작을 통해 의미를 얻는다.

송하진이 강암서예학술재단의 활동과 서예문화의 발전에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여온 것 역시 아버지의 정신적 유산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과 연결해 생각할 수 있다. 다만 그 애정의 진정한 가치는 가족의 이름을 지키는 데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서예인들의 창작 환경을 넓히고 다음 세대가 붓을 잡을 기회를 만드는 데서 더욱 빛날 것이다.

아버지는 서예로 자신의 시대를 살았고, 아들은 행정의 길을 걸은 뒤 다시 서예의 세계로 들어섰다. 두 사람의 인생은 서로 다르지만 붓과 먹을 통해 이어지는 문화적 인연은 깊다.

인생에는 은퇴가 있어도 정신의 성장에는 은퇴가 없다. 한 분야에서의 역할을 마친 뒤 다른 세계에서 새로운 자신을 발견하는 일, 그것 또한 아름다운 인생의 모습이다.
 
꽃은 자연이고, 마음은 인간이며, 글씨는 문화다
이번 전시의 낱말 가운데 ‘꽃’을 생각해 보자. 꽃은 단순한 식물의 한 부분이 아니다. 겨울을 견딘 뿌리와 봄을 기다린 시간, 햇빛과 바람과 물이 함께 만들어낸 생명의 결과다.

서예가가 ‘꽃’이라는 글자를 쓴다면 그는 단지 문자 하나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다. 그 안에 자신이 경험한 봄과 가을, 만남과 이별, 생명의 아름다움과 덧없음을 담을 수 있다.

‘마음’은 어떠한가. 인간은 자신의 마음을 완전히 알지 못한다. 기쁘다가 슬퍼지고, 사랑하다가 미워하며, 확신하다가 흔들린다. 그 보이지 않는 세계를 붓의 움직임으로 표현한다는 것은 인간의 내면을 시각예술로 바꾸는 일이다.

‘사랑’이라는 낱말에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담겨 있다. 가족과 이웃을 사랑하고 자연과 문화를 사랑한다는 것은 결국 자신만을 중심에 놓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리고 ‘시나브로’.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이루어지는 변화다. 나무가 자라고 사람이 성숙하며 문화가 쌓이는 과정이 바로 시나브로다. 강암의 정신이 제자와 후학들에게 이어지고, 아들 송하진이 다시 붓을 잡는 과정 또한 그렇게 오랜 시간을 통해 이루어진 문화적 계승으로 읽힌다.

우리는 인간·문화·자연을 서로 떨어질 수 없는 하나의 세계로 생각한다. 인간은 자연에서 태어나 문화를 만들고, 문화는 인간이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지혜를 담는다.

서예는 그 세 세계가 만나는 예술이다. 자연에서 얻은 재료로 만든 붓과 먹과 종이 위에 인간의 정신이 내려앉고, 그 흔적이 문화가 된다.

서예의 여백도 의미심장하다. 글씨가 없는 공간은 아무것도 없는 빈자리가 아니다. 선과 선 사이의 호흡이며,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연결하는 자리다.

우리 사회는 너무 많은 것으로 공간을 채우며 살아간다. 건물과 도로, 광고와 영상, 정보와 소음이 일상을 가득 메운다. 그러나 정작 생각할 시간과 마음을 돌아볼 여백은 점점 줄어든다.

서예는 우리에게 묻는다. 정말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이 채웠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비워두었느냐가 아니냐고.
 
AI 시대, 인간의 붓끝은 무엇을 지켜야 하는가
이제 인공지능은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며 음악을 만든다. 컴퓨터에 낱말 하나를 입력하면 수많은 서체와 이미지를 순식간에 생성할 수 있다.

그렇다면 사람이 직접 붓을 잡는 행위는 불필요해질 것인가.

나는 오히려 반대의 가능성에 주목한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인간이 직접 행하는 일의 의미를 더욱 깊이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AI는 서예의 시각적 특징을 학습하고 모방할 수 있다. 그러나 한 사람이 수십 년 동안 붓을 잡으며 쌓아온 삶의 경험과 수련의 시간을 그대로 살아낼 수는 없다.

인간의 붓질에는 그날의 호흡이 있고 몸의 상태가 있으며 살아온 기억이 스며든다. 종이 위에 내려앉은 먹은 쉽게 되돌릴 수 없다. 그 불가역성이 예술가에게 책임과 집중을 요구한다.

AI 시대에 인간이 지켜야 할 것은 단순한 손기술만이 아니다. 무엇을 표현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가치관, 왜 그 낱말을 선택했는가에 대한 성찰, 작품을 통해 다른 사람과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가에 대한 책임이다.

서예의 정신은 언어의 윤리로도 확장된다. 우리는 매일 수많은 말을 주고받지만 그 가운데 얼마나 많은 말에 책임을 지고 있는가. 사랑을 말하면서 이웃을 외면하고, 정의를 말하면서 불의를 묵인하며, 자유를 말하면서 다른 사람의 존엄을 침해하고 있지는 않은가.

한 획을 바르게 긋는 것만큼 한 사람을 바르게 대하는 일이 중요하다. 글씨의 균형만큼 사회의 균형을 생각해야 하고, 종이의 여백만큼 타인의 자유를 위한 공간을 남겨두어야 한다.
 
밥과 일과 꿈, 한 낱말에 담긴 우주정신
나는 인간의 삶을 밥과 일과 꿈이라는 세 가지 낱말로 생각하곤 한다. 밥은 생존이고, 일은 세상에 대한 책임이며, 꿈은 인간을 현재의 한계 너머로 이끄는 힘이다.

밥만 있고 꿈이 없다면 삶은 메마르고, 꿈만 있고 일이 없다면 현실을 바꾸기 어렵다. 일만 있고 인간에 대한 사랑이 없다면 성취는 남아도 삶의 향기는 사라진다.

그 세 낱말을 붓으로 쓴다면 어떤 모습이 될까. ‘밥’에는 땅을 일구는 농부의 손길과 가족의 식탁이 떠오를 것이고, ‘일’에는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사람들의 땀이 담길 것이다. ‘꿈’에는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향한 인간의 희망이 깃들 것이다.

강암의 일생도, 그의 정신을 이어가는 제자들의 삶도, 공직에서 물러나 새로운 작품세계를 펼치는 송하진의 행보도 결국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어떻게 완성해 나갈 것인가라는 질문과 만난다.

그 과정에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낱말이 있다. 진리, 정의, 자유다. 진리는 거짓을 경계하게 하고, 정의는 약한 사람의 존엄을 돌아보게 하며, 자유는 인간이 스스로 생각하고 선택할 권리를 지켜준다.

이 낱말들이 삶에서 실천되지 않는다면 아무리 아름답게 써 놓아도 장식에 머물고 만다. 서예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아름다운 글씨의 형식만이 아니다. 자신이 쓴 말에 걸맞게 살아가려는 자세다.

가을은 깊어지고 나무는 잎을 내려놓는다. 자연은 한 해의 시간을 정리하면서도 다음 봄을 준비한다. 사람도 때로는 말을 줄이고 마음을 가다듬어야 한다. 수많은 정보와 소음 속에서 잠시 벗어나 종이 위에 놓인 한 낱말을 오래 바라보는 일, 그것만으로도 우리의 내면은 조금 달라질 수 있다.

강암 송성용이 남긴 정신은 한 시대의 유산으로 끝나지 않았다. 전국의 제자와 후학들이 그 뜻을 이어가고, 강암서예학술재단이 전통과 현대를 연결하며, 그의 아들 송하진이 다시 붓을 들어 자신만의 서예세계를 펼치고 있다.

그것은 한 그루의 나무가 숲이 되고, 숲이 다시 새로운 생명을 키워내는 자연의 이치와 닮았다.

‘한 낱말 글씨전’이 우리에게 남길 가장 큰 선물은 어쩌면 화려한 필법이 아니라 잊고 살았던 말의 소중함일지 모른다.

꽃을 쓰면서 자연을 사랑하고, 마음을 쓰면서 인간을 이해하며, 사랑을 쓰면서 문화의 미래를 꿈꾸는 일. 그것이야말로 인간·문화·자연이 하나로 이어지는 인문자의 세계다.

붓끝의 작은 획 하나가 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그 마음이 다른 사람에게 전해져 세상을 조금 더 따뜻하게 만든다면 예술은 이미 자신의 소명을 다한 것이다.

강암의 붓은 멈췄지만 그가 남긴 묵향은 사람들의 손끝에서 다시 살아난다.

한 획에는 인생이 있고, 한 낱말에는 우주가 있다.

그리고 그 우주를 다음 세대에 전하는 것이 문화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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