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이 상·하원을 모두 장악하면서 인공지능(AI) 산업을 둘러싼 규제 강화 가능성이 국내 반도체 업계의 변수로 떠올랐다. 미국 내 데이터센터 건설에 제동이 걸릴 수 있다는 우려가 확산하면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국내 주요 반도체 기업의 주가도 급락했다. 다만 현재까지 AI 반도체 주문 취소나 공급계약 축소가 확인된 것은 아닌 만큼, 정치적 불확실성이 실제 산업 수요 둔화로 이어질지는 지켜봐야 한다는 분석이다.
7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미국 민주당은 지난 3일(현지시간) 치러진 중간선거에서 상·하원 모두 주도권을 확보했다. 이에 따라 AI 산업과 데이터센터에 대한 규제 강화 움직임이 본격화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왔다. 이가운데에는 전력 소비와 용수 사용, 지역 주민의 전기요금 부담 등 데이터센터 건설을 둘러싼 사회적 갈등이 주요 정책 쟁점으로 부상하고 있다.
미국 민주당 일부 의원들은 데이터센터 투자에 적용되는 100% 보너스 감가상각 혜택을 폐지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해당 제도는 기업이 적격 설비투자 비용을 투자한 해에 전액 공제할 수 있도록 해 초기 세 부담을 낮추는 방식이다. AI 이용과 관련한 세금이나 AI 기업의 이익에 대한 과세 방안도 거론됐다. 이 같은 정책이 현실화하면 데이터센터 사업자의 투자 비용이 늘어나고 신규 시설 건설을 결정하는 과정에도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
다만 민주당의 의회 장악이 곧바로 연방정부의 AI 정책 전환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한국은행 뉴욕사무소는 중간선거 결과만으로 트럼프 행정부의 전반적인 정책 방향이 크게 바뀔 가능성은 제한적이라고 분석했다. 민주당이 양원을 장악하더라도 대통령의 거부권을 무력화할 수 있는 의석을 확보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단기간에 연방 차원의 대규모 AI 투자 규제가 시행되기보다는 의회 차원의 감독과 정책 논의, 주정부 및 지방정부의 인허가 규제 등을 통해 투자 환경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에 무게가 실린다.
실제 미국에서는 주정부 차원의 규제 움직임이 가시화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텍사스주다. 텍사스는 미국 내 주요 데이터센터 집적지 가운데 하나로, 민주당 소속 지나 이노호사 주지사 당선인은 주민 보호 장치가 마련될 때까지 신규 데이터센터 개발을 중단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대규모 데이터센터가 전력망에 부담을 주고 지역 주민의 전기요금을 높이거나 수자원 부족을 심화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이와 관련 영국 에너지시장 조사기관 모도에너지는 주지사 당선인들이 신규 데이터센터 건설 중단 공약을 이행할 경우 미국에서 약 11GW 규모의 신규 데이터센터 건설이 영향을 받을 수 있다고 추산, 이 가운데 약 10GW가 텍사스에 집중된 것으로 분석됐다.
이 같은 우려는 국내 반도체 업계에 민감하게 작용 중이다. 데이터센터 규제는 반도체 생산공장에 직접 조치와는 다르지만, AI 인프라 투자가 위축되면 국내 기업들의 주요 고객사와 공급망 전반에 간접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 AI 데이터센터에는 대규모 연산을 처리하는 그래픽처리장치(GPU)와 이를 뒷받침하는 고대역폭메모리(HBM), 서버용 D램 등 고성능 메모리 반도체가 필수적으로 들어간다. 데이터센터 건설이 지연되면 AI 서버 구축과 GPU 도입 일정도 늦어질 수 있고, 이는 결국 메모리 반도체 수요 증가 속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특히 SK하이닉스는 엔비디아 등 AI 가속기 공급망에 HBM을 공급하는 주요 기업으로, 글로벌 빅테크의 AI 인프라 투자 계획과 밀접하게 연결됐다. 삼성전자 역시 HBM과 서버용 메모리 사업을 확대하고 있으며 미국 텍사스주 오스틴에서 반도체 생산시설을 운영하고 테일러 파운드리 공장을 건설하는 등 현지 사업 기반을 갖추고 있다.
이에 실제 금융시장은 정책 불확실성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코스피는 지난 5일 5.28% 하락한 데 이어 6일에도 6.02% 떨어진 5059.69로 거래를 마쳤다. 6일 장중에는 낙폭이 8.8%까지 확대되면서 서킷브레이커가 발동되기도 했다. 삼성전자는 6.4%, SK하이닉스는 10.4% 하락, 이날 외국인 투자자는 국내 주식을 약 2조8000억원 순매도했다.
그러나 주가 급락을 실제 반도체 수요 감소로 해석하기에는 아직 이르다는 반론도 나온다. 서울경제신문에 따르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고객사들은 미국의 데이터센터 규제 움직임을 이유로 기존 반도체 공급계약을 취소하거나 주문량을 줄이는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다. 이미 건설 중인 데이터센터에 필요한 반도체 생산이 진행되고 있고, 장기 공급계약도 유지되고 있다는 것이다. 업계에서는 현재 AI 메모리 수요가 공급 능력을 웃도는 상황이 이어지고 있어 일부 신규 사업이 지연되더라도 단기간에 주문 감소로 직결되지는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향후 관건은 규제의 실제 시행 범위와 데이터센터 투자 일정의 변화에 있다. 신규 사업에 대한 인허가가 까다로워지더라도 기업들이 사업 자체를 취소하기보다 전력 공급과 인허가 여건이 상대적으로 유리한 다른 지역으로 투자처를 옮길 가능성도 있다. 모도에너지는 규제 대상 지역의 프로젝트가 다른 지역으로 대체될 경우 2030년까지 미국 전체 데이터센터 설비용량 감소분이 약 3GW에 그칠 수 있다고 추산했다. 지역별 규제 강화가 곧바로 미국 전체 AI 투자 축소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다.
다만 중장기적으로는 불확실성이 남아 있다. 데이터센터 건설 지연이 장기화하고 빅테크 기업들의 투자 대비 수익성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신규 AI 인프라 투자 규모와 속도가 조정될 수 있다. 여기에 고금리와 막대한 설비투자 비용까지 겹칠 경우 데이터센터 사업자들이 자금 조달 부담을 줄이기 위해 투자 시기를 늦출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이 경우 HBM을 비롯한 고성능 메모리와 반도체 장비 수요에도 시차를 두고 영향이 나타날 수 있다.
결국 국내 반도체 업계의 향후 실적과 주가 흐름은 미국의 정치적 구도 자체보다 실제 데이터센터 착공 및 인허가 추이, 빅테크의 자본적 지출(CAPEX) 계획, HBM 공급계약과 주문량 변화에 좌우될 것으로 보인다. 당장 AI 반도체 수요가 꺾였다고 판단할 근거는 부족하지만, 미국의 규제 강화가 투자 지연과 비용 증가로 이어질 경우 국내 기업들의 성장 속도에도 영향을 줄 수 있는 만큼 시장의 경계감은 당분간 이어질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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