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의 유동성 공급으로 시중에 풀린 돈이 넘쳐나는 가운데 대기업과 우량 중소기업에만 자금이 쏠리고 신용등급이 낮은 중소기업이나 영세 자영업자들은 돈을 구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
채권 금리 역시 우량채를 중심으로 빠르게 하락하고 있지만, 비우량 등급 채권에는 아직 유동성의 온기가 닿지 않고 있다.
전문가들은 실물경제 구석구석까지 돈이 돌게 하려면 결국 은행들이 적극적으로 대출에 나서는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단기자금 넘쳐..은행 MMF 등에 `이자놀이'
1일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해 9월 리먼브러더스 사태 이후 4개여 월간 한은이 시중에 푼 원화는 22조 원에 이른다.
환매조건부채권(RP) 매각 및 매입 15조9000억 원, 통안증권 중도 환매 7000억 원, 국고채 단순 매입 1조 원, 채권안정펀드 지원 2조1000억 원, 예금지급준비금 이자 지급 5000억 원 등이다. 당초 한은이 공급하기로 계획했던 22조7000억 원 가운데 97%가 집행됐다.
한은이 `곳간'을 열어젖히면서 시중에 단기 유동성은 넘쳐나고 있다.
초단기 금융상품인 머니마켓펀드(MMF)에는 지난 한 달간 20조 원 이상 유입됐고 MMF 설정액은 100조 원을 훌쩍 뛰어넘어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시중에 풀린 돈이 증시 불안, 부동산 및 경기 침체 등으로 마땅한 투자처를 찾지 못하자 조금이라도 높은 이자를 주는 단기금융 상품 쪽으로 몰렸기 때문이다.
은행들도 한은으로부터 저리로 공급받은 돈을 대출로 운용하지 않고 MMF에 넣어두고 있다. 한은이 2.5% 금리로 RP를 사주면 이 돈을 받아 3%대 이자를 주는 MMF에 예치하는 것이다.
경기가 나빠지는 상황에서 기업과 가계에 대출을 많이 해줄 경우 부실화돼 국제결제은행(BIS) 기준 자기자본비율이 하락하고 연체율은 상승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은행들은 심지어 한은에 돈을 도로 맡기는 실정이다.
지난달 9일 시행된 한은의 정례 RP 매각 입찰에는 사상 최대인 80조 원이 몰렸다. 기준금리 수준인 2.50% 이자를 받더라도 한은에 돈을 넣어두는 게 낫다는 판단에서다. 은행들이 남는 자금을 일시적으로 맡기는 한은의 `자금조정예금'도 금리가 1.5%에 불과하지만 자금이 계속 들어오고 있다.
◆채권금리 신용등급별 울고 웃고
한은의 막대한 `물량 공세'에 힘입어 그동안 꽁꽁 얼어붙었던 회사채와 기업어음(CP) 금리는 빠르게 떨어지고 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금리 하락 폭은 신용등급별로 천차만별이다.
증권업협회에 따르면 우량등급인 AA-급 회사채(3년 만기) 금리는 지난해 말 7.72%에서 지난달 30일 현재 7.29%로 0.43%포인트 하락했다. 반면 비우량 등급인 BBB-급 회사채 금리는 같은 기간 12.02%에서 12.16%로 오히려 0.14%포인트 상승했다.
91일짜리 기업어음(CP) 금리도 전체적으로 내림세에 있지만 온기가 골고루 퍼지지는 않고 있다.
신용도가 높은 A1 등급은 작년 말 6.39%에서 지난달 29일 3.98%로 2.41%포인트 급락했지만 비우량 등급인 A3+ 등급은 7.41%에서 6.53%로 0.88%포인트 떨어지는데 그쳤다.
증권업협회의 이한구 채권시장팀장은 "우량채까지는 유동성 공급의 효과가 발휘하고 있지만 구조조정 문제와 경기 악화가 겹치면서 BBB- 등급 이하 회사채 등 신용도가 떨어지는 부문으로는 자금이 충분히 돌지 않고 있다"고 설명했다.
◆우량 대기업엔 `러브콜'..중기는 홀대
은행들이 우량 대기업 위주로 대출하면서 중소기업과 자영업자들은 `돈 가뭄'에 시달리고 있다.
모 은행 대출 담당자는 "신용등급이 좋지 않은 업체에 대출해 줄 경우 자산 건전성에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사실상 신규 대출을 어렵다"면서 "반면 우량업체들은 여러 은행에서 `러브콜'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은행권의 중기 대출 연체율은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다. 중기 대출 연체율은 작년 말 기준 1.70%로 전년 말보다 0.70%포인트 급등한 반면 대기업 대출 연체율은 작년 말 0.34%로 0.03%포인트 하락했다.
한은 관계자는 "1월 들어 은행권의 기업대출은 작년 12월보다 늘어나고 있지만 중기 대출보다 대기업 대출이 더 많이 증가하고 있다"며 "중기 연체율이 급격히 올라가는 등 신용 위험이 커지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고 말했다.
실제로 국민.우리.신한.하나.기업.외환은행 등 6개 시중은행의 중소기업대출 잔액은 지난달 29일 현재 308조2039억 원으로 전월 말보다 0.7%(2조214억 원) 증가하는 데 그쳤다. 증가 폭이 작년 12월의 5조2611억 원보다 절반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다.
반면 기업은행을 제외한 5개 시중은행의 대기업 대출은 지난달 29일 현재 60조4천407억 원으로 5.1%(2조9094억 원) 급증했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대기업들이 현금 확보에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대기업 대출이 늘었다"고 설명했다.
대신증권 성진경 시장전략팀장은 "자금이 돌게 하려면 유동성 공급보다는 은행이 기업 대출을 하도록 유도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채권 발행을 통해 자금을 조달할 수 없는 중소기업이나 자영업자들은 은행 대출에 의존할 수밖에 없어서 결국 은행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야 돈이 돌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은행 자본확충펀드 효과 볼까
금융권은 곧 출범할 은행 자본확충펀드에 어느 정도 기대를 걸고 있다.
금융위원회는 2월 초 펀드 세부운영 방안을 발표한 뒤 같은 달 중순부터 은행들로부터 작년 말 BIS 비율을 감안해 자본 수혈 신청을 받는다. 금융위는 신청 은행들이 발행한 신종자본증권과 후순위채를 사들여 자본을 늘려줄 예정이다.
금융권 관계자는 "자본확충펀드를 통해 자본을 늘린 은행들은 기업 대출이 부실해지더라도 BIS 비율을 일정 수준 유지할 수 있게 돼 신용도에 문제가 생기지 않을 것"이라며 "정부가 적극적인 신청을 독려한다면 은행들도 중기 대출에 나설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러나 시중은행 관계자는 "정부가 은행 경영권에 개입하지 않겠다고 말하고 있지만 상당수 은행은 정부 간섭을 우려해 자본확충펀드 이용을 꺼리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채권시장안정펀드도 뒤늦게 시동을 걸고 있다. 이 펀드는 지난달 29일 회사채 A등급과 BBB+등급, 여전채 A등급을 중심으로 신용보증기금의 신용보강(지급보증)을 거친 채권 1조 원 어치를 사들였다.
이 펀드는 신용등급이 우량한 은행채, 회사채 등에만 투자해 `채권시장 안정용'이라는 본래 기능을 제대로 못 하고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김형기 산은자산운용 본부장은 "채권펀드는 은행 등이 출자한 자금이어서 신용등급이 낮은 채권에 투자하면 투자자들의 위험 가중치가 올라가는 부담이 있다"며 "따라서 신용보강을 거쳐야 하기 때문에 매입에 시간이 걸린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번 달부터는 신용등급이 다소 낮은 채권도 신용보강을 거쳐 적극 매입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인터넷뉴스팀 news@ajnews.co.kr
< '아주경제' (ajnews.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