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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사업가 정주영 모습. (출처=정주영박물관) |
현대그룹과 창업주 정주영은 불굴의 의지의 대명사가 돼 있다. 무조건 될 때까지 한다는 어찌 보면 무식해 보일 만큼 투철한 ‘캔두이즘(CanDoism)’은 지금도 범 현대그룹을 아우르는 일종의 경영 철학으로 자리잡고 있다. 농사꾼 출신인 정주영 회장이 생전 ‘나는 돈 많은 노동자’라며 소탈함을 강조하던 것이 이를 부추겼다.
실제 그의 일생을 훑어 보면 무모하리만치 자신이 뛰어든 일이 무모하게 보일 만큼 전력투구했다. 하지만 그 결과를 보면 대부분 ‘성공’이라는 걸 알 수 있다. 과연 무조건 해서 될 일이었을까. 아니다. 그는 철두철미했고, 똑같은 실수는 반복하지 않았다. 말 그대로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었다. 바로 개선(改善)의 힘이다.
젊은 시절 네 번의 가출에서도 이를 알 수 있다. 첫 번째 가출에서는 둘이 당시 인절미 30개 값도 안 되는 47전만 들고 무작정 떠났다. 원산에 시계방에 취직한 친구가 있었지만 큰 도움이 안 됐다. 최종 목적지인 청진은 가 보지도 못하고 결국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목적지를 서울로 옮겼다. 청진은 걸어서 열흘이 넘게 걸렸지만, 서울은 나흘이면 됐기 때문이다. 나뭇단을 한 돈을 ‘삥땅’쳐서 쌈짓돈도 마련했다. 이도 금강산에서 한 신사 차림의 남자에게 사기를 당하는 바람에 물거품이 됐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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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동아일보에 연재됐던 춘원 이광수의 소설 '흙'. 정주영은 젊은 시절 마을에 들어오는 동아일보를 보는 게 유일한 낙이라고 술회하곤 했다. 실제 그의 '가출 정보'는 대부분 기사를 통해 얻으 것이었다. (제공=정주영 박물관) |
노잣돈 정도로는 안 된다는 교훈은 소 판돈 70원을 훔치는 대담한 세 번째 가출로 이어진다. 2개월 밖에 안 됐지만 이 때 공부한 지식은 나중에 복흥상회 주인의 신임을 받는 데 큰 역할을 하게 된다. 그리고 네 번째 가출에서 마침내 ‘땅 팔고 상경한 시골 사람의 코도 베 간다’는 서울에서 자리를 잡게 된다.
그는 매번 성공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나 결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는 않았다. 이 역시 개선의 힘이다. 쌀가게 배달원이 된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자전거에 서툴렀던 그는 곧 쌀가마니 두 개를 질 수 있는 충무로 바닥의 유일한 배달원이 됐다.
이후로도 마찬가지였다. 국내 굴지의 건설 사업을 맡을 때도, 해외 건설 사업에 처음 진출할 때도 그는 될 사업이니까 뛰어들었다. 정 회장의 일대기를 쓴 기업인 전문 작가 홍하상 씨는 “그는 돈이 있는 곳을 발견해 내는 능력이 탁월했다”고 평하고 있다.
1960~1980년대 고속 성장을 거듭했던 시대에는 정 회장의 캔두이즘을 꿈꿨다. ‘할 수 있다’는 그의 말이 한강의 기적을 불렀다. 그리고 지금도 그의 활력은 여전히 유효하다. 하지만 지금도 정주영을 무조건 일만 하는 ‘무대뽀’로 오해하면 곤란하다. 정주영은 매사에 신중했다. 결단이 과감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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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영(가운데, 당시 15세) 송전소학교 졸업 사진 모습. (출처=정주영박물관) |
아주경제 특별취재팀(김형욱·김병용·이정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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