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 = 조용성 특파원) 강직한 성품에 꼿꼿한 정신의 선비를 연상시키는 리위안차오(李源潮) 공산당 중앙조직부장은 2012년 10월 열릴 18대 공산당 전국대표대회에서 정치국 상무위원에 진출한 후, 2013년 3월 열릴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국가부주석에 오를 것으로 예상되는 차기지도부 핵심인물이다.
중국의 국가부주석은 공산당 서열 6위로 국가주석과 함께 중국을 대표해 외교와 내정을 총괄한다. 현재 국가부주석은 시진핑(習近平)이며 지난 2002년부터 2007년까지는 상하이방의 핵심인물인 쩡칭홍(曾慶紅)이 맡았었다. 쩡칭홍은 부주석에 오르기 전 리위안차오와 같은 중앙조직부장을 역임했다. 리위안차오로서는 쩡칭홍을 따라 국가 부주석에 오르는 것이 현재로서는 최상의 길로 여겨지고 있다.
현재 차기 국가부주석의 자리를 놓고 경합을 벌이고 있는 인물로는 장더장(張德江) 국무원 부총리, 왕양(汪洋) 광둥(廣東)성 서기, 위정성(兪正聲) 상하이 서기, 보시라이(薄熙來) 충칭(重慶)시 서기 등이 꼽힌다. 리위안차오는 리커창 부총리와 함께 공청단파의 선두주자로 후진타오(胡錦濤) 주석의 강력한 후원을 받고 있어 경쟁을 뚫고 부주석의 자리를 꿰찰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
아울러 중앙기율검사위원회 서기에 기용될 가능성도 높다. 중앙기율검사위원회는 중국 공산당내 관리들의 부정 부패와 위법 행위를 조사 감찰하는 준정부 기관이다. 현재 서기는 공산당내 서열 8위인 허궈창(賀國强)이다. 허궈창 역시 중앙기율검사위원회 서기에 오르기 전 공산당 중앙조직부장을 역임했었다. 또한 중앙조직부장은 거의 모든 공산당원들의 인사를 총괄하며, 그들의 비리행위에 대한 정보가 접수되는 자리이기 때문에 기율위 서기로의 자연스러운 업무이동이 가능하다.
이 자리 역시 범죄와의 전쟁으로 지역내 기율을 확실히 잡았던 경험이 있는 보시라이 충칭 서기와의 경합이 예상되고 있다. 또한 기율위원회와 비슷한 역할인 중앙 정치법률위원회의 서기로의 이동도 가능한 시나리오다. 부주석이나 기율위 서기, 정법위 서기 모두 정치국 상무위원의 직책에 해당되며, 그는 명실상부한 차기 중국의 핵심리더 중 한 명으로 꼽히고 있다.
◆후주석의 이부상서(吏部尙書)
현재 리위안차오가 통솔하고 있는 중국공산당 중앙조직부는 중국 공산당의 인사를 주관하는 기관이다. 성(省)과 직할시 또는 국무원의 각 급으로부터 중국공산당 중앙에 우수한 인재를 발탁하거나 간부를 양성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중앙조직부장은 7800만여 명으로 추정되는 중국 공산당원 중 간부 640만명의 인사를 좌지우지하는 당내 최고의 핵심 요직이며 특히 각 성의 당 서기와 성장 등 4100여 개 요직은 모두 리위안차오 중앙조직부장의 손을 거쳐 결정된다.
공산당 중앙조직부장은 2007년에 열린 제17차 당 대회 이전엔 장쩌민(江澤民)과 쩡칭훙의 측근인 허궈창 현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이 맡고 있었다. 2002년 말 당 중앙위 총서기로 선출된 후진타오(胡錦濤) 주석은 집권 전반기(2002년~2007년) 당의 인사를 총괄하는 자리에 자기 사람을 앉히지 못한 한계를 보였다. 집권 후반기에 들어선 2007년 10월이 되서야 후 주석은 자신의 측근인 리위안차오를 중앙조직부장에 앉히면서 명실상부하게 당을 장악했다. 이는 리위안차오에 대한 후 주석의 신임이 두터움을 방증한다.
리 부장은 후 주석이 중국공산주의청년단(공청단) 중앙서기처 서기를 하던 1983년 12월부터 1985년 11월 중앙서기처 제1서기를 끝으로 구이저우(貴州)성 당 서기로 옮길 때까지 약 2년간 후 주석과 함께 공청단 중앙서기처에서 일했다. 후 주석은 1982년 12월 공청단 중앙서기처 서기로 선출돼 1984년 12월 제1서기로 승진했다. 이 시기에 같이 일한 사람들이 바로 리 부장을 비롯해 리커창(李克强) 상임 부총리와 류옌둥(劉延東) 국무위원이다. 이들 3인은 현재 퇀파이의 핵심이자 후 주석의 최측근이다.
◆후의 이념을 현실로 구체화시키다
후 주석은 2002년 국가주석직에 오르면서 ‘조화사회론’과 ‘과학발전관’ 등 두가지 이념적 정책목표를 내놓았다. 당시 성장일변도의 경제발전모델이 극심한 빈부격차를 낳았기 때문에 조화로운 사회로의 정책적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이 ‘조화사회론’의 핵심이다. 또한 노동집약적산업 일변도의 산업구조로 인한 중복투자, 환경파괴, 저부가가치산업 일색인 산업구조를 타파하자는 것이 ‘과학발전관’이었다.
후주석의 두가지 정책목표는 당시 현실을 꿰뚫고 있는 미래지향적인 방향제시였다. 하지만 당시 후 주석의 외침은 철학적이고 사변적인 데 그쳐 공무원들이나 지방정부 관료들에게는 다소 실행에 어려운 것들이었다. 중국의 한 정치학자는 “후 주석의 방향제시는 옳았지만 이를 구체적으로 실행할 로드맵이나 방법제시가 부족했기 때문에 공허한 외침에 불과했었다”고 당시를 평가했다.
하지만 이를 현실에 구체화시키고, 개혁정책들을 쏟아내며 적용해 낸 사람이 바로 리위안차오였다. 공청단파로 후 주석의 측근이었던 리위안차오는 중앙과의 교감을 통해 두가지 정책방향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후 주석 역시 리위안차오를 2002년 장쑤(江蘇)성 서기로 발령을 내 그에게 기회를 줬다.
그는 장쑤성에서 양적인 성장은 물론 질적인 성장을 일궈내며 후 주석의 이론을 실제로 뒷받침했다. 후 주석 역시 당시 리위안차오의 장쑤성에 자주 들러 그에게 여러 차례 힘을 실어주면서 그는 중국의 실력자로 발돋움하게 된다.
◆4가지 색 마법옷
리위안차오는 그의 정치역정이나 배경에 있어서 시진핑, 리커창에 못지 않은 풍부한 자질을 지니고 있다. 리우팡위안(劉方遠)이 쓴 ‘리위안차오전(傳)’은 그를 이렇게 묘사한다.
“풍부한 배경을 가진 그는 마치 변화무쌍한 마법의 옷을 입은 것처럼 어떤 환경에든 쉽게 적응해낸다. 리위안차오는 일단 고위관료의 아들이기 때문에 태자당이다. 또 공청단에서 후주석과 함께 근무했기 때문에 공청단파다. 또 상하이 출신이며, 상하이지역 인사들과의 네트워크가 두터워 상하이방이라고 말할 수 있다. 베이징대 리이닝(歷以寧)교수로부터 석사학위를 받았기 때문에 베이다(北大)방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같은 마법의 옷을 걸치고 있으면서도 그의 나이 50세 전에 능력을 뽐내지 못하고, 문화부 부부장이라는 초라한 곳에서 관료생활을 마감할 뻔 했으나, 2000년 들어서면서부터 그의 관운이 트이기 시작했다. 말하자면 21세기의 도래와 함께 그의 재능이 폭발됐다는 것.
그는 장쑤성 서기로 재직하며 자신의 기량을 한껏 펼치며 차기 지도자로 부상했다. 그리고 상하이시 서기 후보로까지 올라가게 된다. 2006년 상하이시 서기인 천량위(陳良宇)가 낙마한 이후 그 후임자 인선문제는 상하이방과 공청단파의 정치적인 세력갈등으로까지 비화됐다. 이로 인해 상하이 후임 서기에 전국적인 관심이 쏟아졌다. 중국의 지도층은 인선작업에 한층 골머리를 앓았고 상하이서기는 6개월여 공석으로 남겨졌었다.
최종적인 후보자는 저장(浙江)성 서기였던 시진핑, 장쑤성 서기였던 리위안차오, 산둥(山東)성 서기 장가오리(張高麗) 등 세명이었다. 당시 중앙조직부는 각 해당 성을 찾아가 평판조사를 벌였었고, 결과적으로 시진핑이 가장 좋은 평가를 얻었다. 리위안차오는 득표수에서 시진핑에는 못미쳤지만 상당히 높은 득표를 기록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리위안차오는 장쑤성의 원로들이 그를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서 점수를 깎인 것으로 알려졌다. 관련인사는 만약 리위안차오가 난징(南京)의 당 원로들을 조금 더 유연한 태도로 대했고, 좀 더 살뜰하게 보살폈더라면 2007년 3월에 상하이서기는 시진핑이 아나리 리커창이 됐을 수도 있다고 말하고 있다. 만약 그렇게 됐다면 리위안차오는 차기지도부의 주석이나 총리자리까지 넘볼 수 있다는 가설도 가능하다.
상하이 서기에는 오르지 못했지만 그는 마지막까지 시진핑과 경합을 겨루며 정치적 잠재력을 증명해보이는 성과를 거뒀다.
◆강직한 원칙주의자 관료
그는 ‘청백리’ ‘철완(鐵碗)관료’라는 별명을 얻고 있는 원칙주의자다. 1980년대 후반 공청단 중앙서기처 서기로 근무할 때 리위안차오는 그의 몸에 배인 ‘서생티’를 벗지 못했으며, 관리사회의 기풍에 적응하지 못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각 성시로 출장을 갈 때면 중앙이 규정한 대로 ‘네가지 요리에 탕 한가지(四菜一湯, 소박하고 간단한 식단)’가 나오는 식사자리에만 갔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아예 식사자리에 앉으려 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실랑이가 벌어지기 일쑤였고 끝내는 감정싸움으로 인한 대치상황이 발생하기도 했다. 공청단 지방위원회의 수장들은 리위안차오의 대쪽 같은 성품에 난처했던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원칙주의자답게 간부임용에 있어서 리위안차오는 덕과 재능의 겸비를 중요시했으며, 굳이 따지자면 재능보다는 덕에 무게를 뒀다. 특히 그는 “당간부는 세가지를 경외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자주 말한다. 첫번째는 역사에 대한 경외감으로, 자신이 하려는 일이 역사의 경험을 통해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두번째는 인민에 대한 경외심이다. 자신이 한 일이 인민들의 삶에 부합해야 한다는 것이며 세번째로는 인생에 대한 경외심을 꼽는다. 그는 “먼 훗날 고개를 돌려 과거를 돌아볼 때 스스로 후회가 들지 않아야 한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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