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진핑시대 핵심100인]<4>리위안차오 -② 10년의 좌천과 10년의 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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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1-04-18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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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 = 조용성 특파원) 리위안차오(李源潮)는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11월에 장쑤(江蘇)성 롄수이(漣水)에서 태어났다. 리 위안차오의 아버지인 리간청(李幹成,1909-1993)은 그의 이름을 중국이 한국전쟁을 부르는 공식명칭인 항미원조(抗美援朝, 미국에 대항해 조선을 돕자는 뜻)전쟁을 따서 리위안차오(李援朝)로 지었다. 하지만 얼마 안 돼 이름이 부적절하다고 생각해 발음은 같고 한자가 다른 위안차오(源潮)로 바꿨다.

리간청은 1930년에 공산당에 입당해 상하이 등지에서 혁명활동을 벌였으며 국민당에게 붙잡혀 5년간의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1937년에는 항일전쟁에 참전했으며 국공내전때도 공을 세웠다.

그의 모친 뤼지잉(呂繼英)은 1928년 공산당에 입당해 공산당활동을 하다가 홍14군의 지도자였던 리차오스(李超時)와 결혼한다. 당시 홍14군의 지도자로는 현 국무위원인 류옌둥(劉延東)의 아버지인 류루이롱(劉瑞龍)도 포함돼 있었다. 1931년 국민당군에 붙잡힌 리차오스 부부는 혹독한 고문을 당한다. 리차오스는 끝내 옥중에서 사망했고, 당시 임신 4개월이었던 뤼지잉은 옥중에서 첫째 아들인 리테청(李鐵成, 현 중국인민대학교 퇴임교수)을 출산한다.

4년간의 옥고 끝에 아들과 함께 출감한 뤼지잉은 이후 리간청과 결혼해 4남1녀를 낳는다. 그 중 셋째아들이 리위안차오다.

◆혁명가 부모의 아들로 태어나

리위안차오가 12살이던 1962년 리간청은 상하이시 부시장이었다. 고급관리였던 아버지덕에 리위안차오는 지역명문인 상하이중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상하이중학교는 쩡칭홍(曾慶紅)이 다녔던 학교이기도 하다. 하지만 문혁기간 중 상하이중학은 중대재난구역으로 지정됐고 1970년 강제로 폐교됐다.

문화대혁명시기 리위안차오는 부친인 리간청이 반동으로 몰린 영향으로 일순간에 반동자녀로 분류돼 농촌으로 하방당하는 불운을 겪는다. 1968년부터 그는 장쑤(江蘇)성 다펑(大豊)현에 있는 상하이시 노동개조국 상하이농장에서 농민으로 4년간 노동을 했다. 이후 1972년 리위안차오는 공농병 청강생 자격으로 추천을 받아 상하이 사범대학 수학과에 입학했다. 1974년 졸업한 후 상하이시 난창(南昌)중학교 교사로, 그리고 1976년에 상하이시 루만(盧灣)구 야간공업전문대 교수로 자리를 옮겼다.

문혁이 끝나고 1977년 대학입시가 부활된 후 그는 공농병 청강생의 학력이 대단한 것이 아니라 여겨 푸단(復旦)대학 수학과에 다시 입학했다.

리위안차오는 훗날 “많은 사람들이 상하이에서 비교적 좋은 직업을 가지고 있는데 왜 다시 대학에 들어가냐고 만류를 했다. 당시 많은 친구들은 정상적인 대학진학을 포기했었다. 하지만, 나는 좋은 대학에서 공부하는게 꿈이었다. 문혁은 우리시대 사람들에게 대학갈 기회를 앗아간 아픔을 남겼다”고 회고했다.

◆28세 푸단대 늦깍이 입학한 수학천재

1978년 봄 리위안차오는 푸단대학 수학과에 입학했다. 그의 나이 28세였다. 나이 많은 학생인 리위안차오는 누구보다 학업에 열중했으며 밤 11시 기숙사가 소등된 이후에는 학교건물 앞에 있는 가로등 밑에서 수학서적과 외국어교재를 읽었다고 한다. 지금도 유창한 영어를 할 수 있는 리위안차오는 “내 영어는 해외에서 배운 게 아니라 가로등 밑에서 배운 것”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하곤 한다.

그는 대학교 2학년이던 1979년 동갑내기인 가오젠진(高建進, 현 중앙음악학원 교수)과 결혼한다. 리 부장의 장인도 일찍이 상하이시 건설위원위 부주임을 지낸 당 간부 출신이다. 차분한 성격의 부인은 상하이음악학원을 졸업하자마자 리위안차오와 결혼했다. 아들 리하이진(李海進)은 2003년 푸단(復旦)대 회계학과에 들어가 졸업했다.

◆대학졸업과 동시에 공청단의 길로

1982년 대학을 졸업한 리위안차오는 푸단대학 관리과 교수가 됐다. 동시에 그는 공청단 푸단대학 위원회 부서기를 맡았다. 이후 1983년 연말에 열린 공청단 제11기3중전회에서 그는 쑹더푸(宋德福)와 함께 공청단 중앙서기처 서기에 발탁됐다. 당시 리커창(李克强)은 서기처 후보서기로 리위안차오보다 서열이 아래였다.

당시 후진타오는 공청단 제1서기였다. 이후 1985년 후진타오가 구이저우(貴州)성 위원회 서기를 맡을때까지 그는 후 주석의 지도아래 업무를 했다.

공청단 중앙에서 일하는 동안 리위안차오는 리이닝(歷以寧)교수의 연구생이 되어 1986년 베이징대학 경제관리학 석사학위를 취득했고, 1995년에는 중앙당교 과학사회주의 전공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 밖에도 리위안차오는 2001년 난징시 위원회 서기를 맡고 있는 동안 6개월 기한으로 하버드대학 케네디스쿨의 ‘개발도상국 지도자’교육반을 수료했다.

◆천안문사태로 인해 10년 좌천

1989년 톈안먼(天安門)사태때 중국당국은 강경대응으로 일관했다. 하지만 공청단 서기였던 리위안차오는 중국청년보를 찾아가 기자들을 위로하는 등 덜 강경한 모습을 보였고, 이로 인해 그는 문책성 인사를 받게 된다.

이후 1990년 12월 그는 공청단에서의 근무를 마치고 중앙 대외선전소조 1국 국장을 맡았다. 류옌둥도 3개월 후 중앙 통일전선공작부 부비서장으로 자리를 옮겼으며 이로 인해 공청단은 리커창이 접수하게 됐다. 이 시점부터 리커창은 리위안차오보다 서열이 높아진다.

공청단 중앙서기처 서기의 몸에서 뜻밖에 국장급 간부로 이동한 것은 사실상 좌천이었다. 1993년 그는 국무원 뉴스판공실 부주임으로 승진했고, 3년간 대외선전업무에 종사한 후 1996년 그는 다시 문화부 부부장(차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이 곳에서 4년동안 일을 했다. 공청단 서기 출신에게 문화부 부부장 자리는 실권은 적고 위험은 큰 왜소한 보직이었다. 10년동안 그는 초고속승진을 하거나 안정적인 경륜을 얻지는 못했지만 정치적으로 성숙해지는 계기가 됐다.

◆21세기 시작과 동시에 관운이 풀려

2000년 10월 그는 장쑤성 부서기로 부임해갔다. 그는 당시 부임길에 “내가 지방에 가서 일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구한 게 벌써 10년째다”고 털어놓았다. 이후 2002년 후진타오 주석이 공산당 중앙위 총서기에 임명되자 최측근인 그는 장쑤성 서기로 임명된다. 경제성장 방식의 전환 필요성에 대해 일찍이 후 주석과 교감을 나눈 그는 다른 지방 지도자들이 후 주석이 제창한 ‘과학발전관’과 ‘조화사회론’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인 것과 달리 이를 주도적으로 추진했다. 그는 장쑤성 서기로 취임하자마자 종전의 구호인 ‘강성부민(强省富民)’을 ‘부민강성(富民强省)’으로 바꿨다. 이는 중국이 과거 국부론을 민부론으로 전환한 것과 일맥 상통한다.

우선 리위안차오는 장쑤성의 발전계획을 국내총생산(GDP) 성장만 중시하는 방식에서 성내 전 지역이 골고루 잘사는 방향으로 전환했다. 또한 ‘조화사회’가 단순한 정치 구호에 머물지 않도록 4개 분야, 25개 항목으로 된 ‘조화사회 표준지표’를 처음 고안했다. 이는 1인당 GDP는 물론 도시의 가처분 소득, 실업률, 엥겔계수, 녹지비율, 분배구조, 촌민 자치율까지 총괄하는 개념이다.

◆중복투자 톄번, 일벌백계 삼아

당시 중국의 중복투자와 과열결쟁을 우려하던 중앙정부는 거시적인 조정정책을 검토했으며 그 첫번째 표적으로 장쑤성의 민영기업 ‘톄번(鐵本)’이 꼽혔다. ‘톄번’은 당시 장쑤성 창저우(常州)시와 성위원회 일부 멤버의 지지로 투자총액 106억 위안의 초대형 제철공장건설을 추진하고 있었다. 이 제철공장이 완성되면 연간 840만 t을 생산하게 돼, 상하이의 바오강(寶鋼)을 뛰어넘어 중국 1위 제철기업으로 우뚝 서게 된다. 하지만 이는 지역내 중복투자였고, 공급과잉을 불러일으킬 것이라는 우려가 높았다.

리위안차오는 사업허가과정에서 규정을 위반한 사례가 있음을 밝혀내고, 그날 바로 성 위원회를 소집해 ‘톄번’프로젝트에 관련된 정부와 은행 관련책임자 8명에 대해 당규약과 정부 기율에 따라 처벌 결정을 내렸다. 또 과열경제에 대한 정리와 행정 처분을 결정했다. 이틀 뒤 후진타오 주석이 베이징에서 장쑤성으로 직접 시찰을 내려와 ‘톄번’사건의 처리에 대해 리위안차오를 전적으로 지지했다. 후 주석의 리위안차오에 대한 신임이 다시한번 중국 전대륙에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리위안차오는 톄번에 그치지 않고 1000여 개의 과잉투자 항목을 취소하거나 연기했다. 덕분에 장쑤성의 과잉투자는 확실하게 바로잡혔다. 원자바오(溫家寶) 총리가 이를 거시조정의 대표적인 성공사례로 꼽았을 정도다.

◆질적성장 실천의 선구자격

2007년 5월 중국의 3대 호수 중 하나인 우시(無錫)의 타이후(太湖)가 오염돼 녹조현상이 발생, 식수로 쓸 수 없게 됐을 때도 그는 단호한 조치를 취했다. “장쑤성의 GDP가 15% 줄어도 좋다”며 화공, 야금, 인쇄, 염색, 제지, 전기도금 등 폐수를 많이 배출하는, 호수 주변 업체 2150개를 퇴출하는 극약 처방을 내렸다.

그렇다고 이런 정책들이 장쑤성 경제 발전의 발목을 잡은 것은 아니다. 그가 장쑤성 서기로 재임하던 2004~06년 3년간 장쑤성의 발전 속도는 전국 3위를 기록했다. 실업률도 계속 내려가고 있다. 최근 중앙정부가 내세우는 양과 질을 모두 만족시키는(又好又快) 발전을 미리 실천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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