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 = 조용성 특파원) 2003년. 한정(韓正) 상하이 시장은 중국정계에 떠오르는 정치스타였다. 그는 그해 2월 48세의 나이에 상하이시 시장으로 임명됐다. 1949년 공산당 정권이 수립된 이래 두번째 40대 상하이 시장이었다. 첫번째 40대 상하이 시장은 1949년 48세의 나이로 상하이 시장이 된 천이(陳毅)였다. 당시에는 국공내전이 종결된 직후라 젊은층이 대거 요직에 등용되던 시절이었다. 사실상 한정은 최초의 40대 상하이 시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화대혁명 시절 4인방의 좌장격이던 장춘차오(張春橋)는 그의 나이 51세였던 1968년에 비로소 상하이 시장 직을 거머쥐었다. 장쩌민(江澤民) 전 주석, 주룽지(朱鎔基) 전 총리, 황쥐(黃菊) 전 부총리 등 과거 정권 핵심인사들도 60세 전후가 돼서야 상하이 시장을 맡았다. 한정의 전임자인 천량위(陳良宇) 전 상하이 서기 역시 2001년 말 상하이 시장 직을 처음 맡았을 때 56세였다.
당시 한정은 상하이 시장 출신인 장쩌민(江澤民) 전 국가주석이나 주룽지(朱鎔基) 전 총리 처럼 요직에 등용될 것으로 여겨졌다.
그는 정치적 배경도 좋았다. 상하이시 공청단 서기를 역임했기 때문에 공청단파로 분류되지만 상하이에서 성장했고, 상하이방 원로들의 신임을 얻었기 때문에 실제로는 상하이방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이나 장쩌민 전 주석 등 양진영이 모두 받아들일 수 있는 정치적 자질이다.
◆2006년 저승사자들이 찾아오다
상하이 시장이 된 이후 승승장구하던 그는 2006년 7월 서슬퍼런 ‘저승사자’들을 대면하게 된다. 당시 후진타오 주석의 정치적인 맹우인 우관정(吳官正)이 이끄는 중앙기율위원회는 10여명의 베테랑 수사관을 상하이에 파견보냈다. 그들은 한정을 조용한 곳으로 불러서 대화를 나누게 된다. 중기위 요원들은 세가지 거부할 수 없는 부탁을 했다. 첫번째는 중기위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속마음으로 다른 뜻을 품지 말라는 것이었다. 두번째는 심적 부담을 벗어던지고 당과 인민의 편에 서서 상하이 시위원회의 위법활동들을 말해주길 희망한다는 것. 세번째는 결코 동요되지 말고 시장직을 충실히 수행해 상하이의 사회질서와 경제활동에 혼란을 방지하라는 것이었다.
중기위의 칼끝은 천량위 상하이 서기를 겨누고 있었다. 천량위는 당시 분배와 내륙개발정책을 펴던 원자바오 총리와 탁상을 치면서 언쟁을 벌일 정도로 성장일변도 정책을 주장했다. 상하이는 공산당정부 수립 이후 줄곧 상하이 출신 관료들이 통치해 왔으며 중앙정부와 자주 엇박자를 냈다. 상하이시 서기 출신인 장쩌민 주석 시절에는 충분히 용인될 수 있는 일이었지만 후진타오 주석으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천량위는 결국 그해 9월25일 비리혐의가 드러나며 전격 해임됐고, 한정은 그 다음날인 26일 대리서기에 임명된다. 천량위가 상하이시 1인자로서 대규모 횡령을 저지를 당시 한정은 직급상 상하이시의 2인자였다. 당시 홍콩과 서방 언론들은 한정 역시 천량위사건에 연루되었을 것이라고 해석했다. 다만 상하이시의 동요를 막기 위해 현지 사정에 정통한 한정으로 하여금 뒷수습을 하게 했다는 것.
◆바짝 엎드린 나날들
한정은 대리서기가 되자 마자 “상하이는 수많은 기회와 도전, 심지어는 곤란에 직면해 있다”면서 “시 전체는 당 중앙의 요구에 따라 정신을 가다듬고 창조적 혁신 노력을 기울여 경제, 사회발전을 지속해 나갈 것”이라고 중앙 정부의 정책에 순종할 것임을 밝혔다.
그는 이듬해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상하이가 후진타오 국가주석이 지시한 ‘4개 솔선(四個率先)’ 방침 실현을 위해 노력하고, 중앙의 요구에 따라 확고하게 과학적 발전관을 이행, 실천하는 한편 중앙 정부에서 추진하는 거시경제통제정책의 각 항목을 단호하게 관철했기 때문에 전체적인 삶의 질이 개선되고 있다”고 말해 정치적 기민함을 보였다.
정치평론가 린허리(林和立)은 천량위 사건을 두고 일석수조(一石數鳥)라고 평했다. 그는 후 주석의 천량위 사건 처리와 관련해 다음과 같이 논했다.“천량위는 장쩌민을 수장으로 하는 상하이방의 이익을 돌보는 중책을 맡고 있었다. 천량위를 축출함으로서 상하이방은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입게 됐다. 후진타오 주석은 그동안 중앙의 정책에 걸핏하면 반기를 들던 상하이시의 공무원들을 장악하게 됐다. 또한 후진타오는 줄곧 조심스러운 나머지 패기가 없다는 이미지를 풍겼으나 정치국위원인 천량위를 가차없이 내침으로서 간부는 물론이고 인민의 신임을 얻었다. 후주석은 천량위의 전 비서인 친위(秦裕)를 구속한 이후 선전부를 통해 매일 ‘장쩌민의 문선을 학습하자’라는 활동을 전개해 상하이방을 안심시킨 후 일거에 천량위를 내치는 수완을 발휘했다. 이로써 상하이방 구성원들은 후진타오에 대해 더없이 공손한 태도를 보이게 됐다. 이로써 2007년 17차 전국대표대회에서의 인사에서 주도권을 장악했다”
천량위 사건으로 인해 한정은 입지가 좁아지게 됐다. 한편으로 이 경험은 한정을 더욱 성숙한 정치인으로 만드는 계기가 된다. 이후 2007년 3월 시진핑(習近平)이 상하이시 서기로 부임해 왔다. 현지 공무원들은 시진핑이 대대적인 숙청을 하는 것 아니냐는 불안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하지만 시진핑은 한정 상하이 시장에 대해 신뢰를 보이면서 공무원 사회를 안정시켰다.
◆위정성의 도움으로 위기를 극복
그해 10월 제17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시진핑이 부주석으로 승진하면서 베이징에 입성했고, 위정성(兪正聲) 후베이(湖北)성 서기가 신임 상하이서기로 부임해 왔다. 홍콩의 명경망에 따르면 중국 공산당은 위정성 서기가 상하이시에 안착하는 대로 한정을 다른 지방으로 보내려는 계획이었다고 한다. 실제 2009년에는 한정이 구이저우(貴州)성 서기로 이동해 갈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했었다. 상하이 시장이 구이저우 서기로 가는 것은 직급상 승진이지만, 실제로는 좌천이었다. 구이저우 서기를 맡겼다가 자연스럽게 한직으로 보내겠다는 게 당 중앙의 복안이었다는 것.
하지만 위정성은 한정의 이동을 막아섰다. 표면적으로 내건 명분은 2010년 세계박람회를 앞두고 상하이에서 25년간을 근무해 현지에 정통한 한정 시장을 다른 곳으로 보낼 수 없다는 것이었다. 정치국위원이며 유력한 차기 상무위원 후보인 위정성의 보호로 인해 한정은 좌천의 고비를 넘겼으며, 사실상 2012년까지 임기를 보장받게 됐다.
위정성의 이같은 조치는 한정의 정치력을 북돋아줬고, 한정은 서서히 천량위사건으로 인한 상처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또한 그는 세계박람회를 무난하게 성공시켰다는 업적을 갖게 됐다. 이를 토대로 한정은 2013년 있을 제18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정치국위원으로의 승진이 유력시되고 있다.
특히 후진타오 주석과 장쩌민 전 주석이 모두 받아들일 수 있는 기본적인 정치자질에 천량위 사건으로 인한 혹독한 시련을 통해 단련된 정치력이 더해졌다는 것은 그의 강점이다. 한정은 이미 상하이 시장으로 두번의 임기를 채웠기 때문에 내년에는 다른 지역의 서기나 국무원 중앙부처의 부장급으로의 이동이 점쳐지고 있다.
◆주룽지의 발탁을 받고 성장
1954년 4월 저장(浙江)성 츠시(慈溪)에서 출생한 한정은 문화대혁명이 종료될 무렵인 1975년 상하이 상하이(上海) 쉬후이(徐匯) 중량물보장공장 창고관리직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상하이 화학공업국 공청단 위원회 서기를 지냈으며, 상하이의 화학공장에서 15년간 근무한다.
1990년 주룽지 전 총리가 상하이시 서기를 맡았을 시기에 36세의 한정은 상하이시 공청단 부서기로 발탁된다. 이듬해 그는 상하이 공청단 서기를 맡게 된다. 2년여 상하이 공청단을 이끌었던 경력으로 그는 공청단파와 관계를 맺게 된다. 하지만 공청단 근무경력이 비교적 짧기 때문에 공청단파 색채가 옅을 수밖에 없다. 또한 그의 인맥 대부분이 상하이방 계열 인사들이기 때문에 그는 상하이방으로 분류된다.
덩샤오핑이 남순강화를 하며 중국 전역에 개혁개방 바람을 불러일으킬 때 한정은 상하이시 루완(盧灣)구 부서기로 이동된다. 이 곳에서 3년간 근무하면서 그는 화이하이루(匯海路)를 개조해 상하이의 대표적인 상업지구로 변모시키는 실적을 거뒀고 이 시절의 활약은 향후 고속승진을 하는 기초가 된다. 당시 상하이서기는 우방궈(吳邦國) 현 전인대 위원장이었고, 시장은 황쥐(黃菊) 전 부총리였다.
◆상하이시장만 10년
1995년 그는 상하이 시정부 비서장으로 승진했다. 이 시절 그는 화둥(華東)사범대학 국제관계세계경제학과에서 경제학 석사학위를 취득한다. 상하이시 정부 부비서장이란 위치는 의전과 조율을 도맡아 하는 자리로 시간을 내서 공부를 하기가 결코 쉽지 않은 자리다. 때문에 한정의 석사학위에 대해 ‘가짜’라는 소문이 돌았다. 이 역시 한정에게는 또 다른 오점이다.
당시 상하이방의 거두인 황쥐 상하이 서기는 부비서장이던 한정의 근면함을 눈여겨보고, 44세의 한정을 1998년 상하이 부시장으로 파격 발탁한다.
2001년 총리 후보로까지 거론되던 쉬쾅디(徐匡迪) 상하이 시장이 돌연 사임했다. 쉬쾅디의 후임이 바로 천량위다. 이는 천량위를 황쥐 당시 상하이 서기의 후임 서기로 만들기 위한 사전 조치였다. 이듬해인 2002년 11월에 황쥐가 상무위원 겸 부총리에 선출되어 중앙으로 올라가자 천량위는 시장이 된 지 1년여 만에 서기에 올랐다.
천량위의 승진으로 공석이 된 상하이 시장은 한정이 채웠다. 그는 1998년 부시장 시절부터 도시계획과 교통문제를 담당하며 상하이시를 실무적이며 효율적인 현대화 도시로 탈바꿈시켰다는 평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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