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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부자이야기] 나는 이렇게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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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1-11-28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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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놈 출신 바링허우 ‘류치카이’의 성공기

(아주경제 홍우리 기자)  "촌놈에 공부도 못한다고 나를 무시했지? 지금 상하이에서 잘 사는 사람 중 대부분은 나처럼 타지에서 온 사람들이야. 내가 촌놈이라고 놀리는 건 너희 부모님, 혹은 할머니 할아버지를 놀리는 것과 다름 없어. 그리고 앞으로 있을 시험에서 나는 5등 안에 들겠어. 두고봐!"
 
중국의 '혁명 성지' 징강산(井岡山)'의 산골마을에서 1981년 태어난 류치카이(劉琦開).  초등학교 3학년이 되던 해 아버지를 따라 상하이로 이사를 갔지만 대도시에서의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반 친구들의 냉대와 편견을 견디다 못한 류치카이는 담임선생님께 학급회의를 열어줄 것을 부탁하고 회의에서 위와 같은 '선언'을 했다.  목소리가 흔들리고 눈가에는 눈물이 맺혔지만 작은 체구의 류치카이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에 반은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3개월 뒤 찾아온 기말고사. 류치카이는 반 5등이 아닌 전교 3등을 차지하며 도시 아이들의 코를 납짝하게 만들었다.

'문제가 생기면 정면으로 도전하라' 그 날의 경험이 남긴 교훈이다.

류치카이는 집에서도 '똑 소리 나는' 아들이었다. 어린시절부터 경제관념이 투철해 집안의 가계부를 맡았다. 소매업을 하던 아버지는 얼마의 지출 액을 빼고 한달 동안 번 돈 전부를 류치카이에게 맡겼고 형과 누이도 어린 동생에게 생활비를 맡겼다.

중학교 2학년 여름방학 어느 날, 류치카이는 이웃의 부자(父子)가 과수원으로부터 포도를 들여다 도시에 도매로 넘기는 것을 보았다. 류치카이는 곧 자신도 데려가달라며 그들을 졸라댔고 결국 자신의 몫으로 포도 15kg을 팔 수 있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포도 15kg으로 번 돈이 30kg을 판 돈보다 많았다. 사돈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법. 이웃 부자는 그 날 이후 류치카이를 피했지만 류치카이는 개의치 않았다.

류치카이는 남들보다 두 시간 일찍 과수원에 가 물건을 받았다. 물건 받는 시간이 앞당겨지니 시장에 좋은 자리를 잡기가 수월했고 신선한 품질의 과일을 더 좋은 값에 넘길 수 있었다.

짧은 여름방학 동안 과일을 내다판 돈은 천위안이 넘었다. 중학교 졸업까지 필요한 학비를 내고도 남는 돈이 있을 만큼 큰 돈이었다.

2001년, 류치카이는 충칭(重慶)의 이공대학에 입학했지만 등록금, 기숙사비, 책 값 등 대학 4년 동안 들어가는 돈이 부담이었다. 집안의 돈을 긁어 모아도 역부족이었다. 대학교에 입학한 첫날부터 류치카이는 학업과 돈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고심했다.

그의 전공은 경영마케팅. 1학년 겨울방학 동안 시장 조사를 마친 류치카이는 2학년 여름방학이 되자 난창(南昌)으로 가 오토바이 머플러를 팔았다. 3학년 겨울 방학에는 상하이 푸둥의 한 무역회사에 인턴 직원으로 들어갔다.

타이핑, 복사, 송금 등 하는 일이라곤 잡무뿐이었지만 류치카이는 실무를 익힐 기회라고 생각했다. 어깨너머로 선배들의 노하우를 익히며 남는 시간을 이용해 대외무역 관련 서적을 섭렵했다. 얼마 뒤 류치카이는 회사에 정식으로 무역 관련 업무를 달라고 요구, 강철파이프 해외수출 업무를 담당하게 되었다. 사실 그가 맡게 된 일은 회사의 가장 큰 골칫거리였지만 일찌감치 방법을 생각해 둔 류치카이에게는 오히려 잘 된 일이었다. 류치카이는 인터넷을 통해 강철파이프를 필요로 할만한 해외 업체들을 찾아 메일을 보냈다. 보낸 메일 수가 만여 통이 되었을 때쯤, 마침내 싱가폴의 한 업체로부터 연락이 왔고 그는 곧 첫 거래를 성사시키며 회사의 다크호스로 떠올랐다.

 그 날 이후 류치카이의 꿈은 더욱 원대해졌다. 자신의 회사를 갖고 싶다고 생각한 류치카이는 곧 창업에 착수했다. 그러나 무역회사를 세우기 위해 필요한 수ㆍ출입권 및 수속을 위해서는 상당한 자금이 필요했다. '합자회사 형식으로 투자를 받는다면...' 류치카이는 상하이에 진출해있던 외자은행의 문을 두드렸다. 문전박대를 무릎 쓰고 끈질기게 HSBC 중국 대표부를 찾아간 끝에 마침내 총 책임자를 만날 수 있었다. 황당함과 미심쩍다는 눈초리에도 불구하고 류치카이는 준비해간 한 시간 분량 사업계획서를 30분만에 설명했다. 이후 4시간에 걸친 단독면담, HSBC 중국 책임자는 류치카이에게 100만달러의 투자를 약속했다. 동시에 다른 외국계 은행들도 그에게 서비스 지원을 약속했다.

주도면밀한 사업계획서와 '배짱'을 무기로 류치카이는 1000만위안의 종잣돈을 마련, 2004년 마침내 파이프 수출입을 주 사업으로 하는 '타이커(泰科)주식유한공사'를 차렸다. 수 많은 업체로부터 총판 업무를 위탁 받은 타이커는 승승장구하며 1년만에 미국 아르헨티나 영국 이집트 이란 한국 등 십여 개 국가에서 판매망을 갖춘 업체로 성장했다.

2005년 5월에는 상하이와 광저우에 이어 충칭에 광케이블이 설치되는 데서 비즈니스 기회를 발견, IT 회사인 충칭왕나(網納)과학기술유한공사를 차리고 포털사이트인 '대학인(大學人)' 문을 열었다. 다시 4개월 뒤 9월에는 충칭에 악세사리 전문점 '한청치위안(漢城奇緣)'을 내고 서울 등지로부터 수입한 패션 액세서리를 판매했다.

 ‘사상과 영감’을 중시하는 류치카이는 오늘 날 천만 위안(한화 약 18억원) 이상을 보유한 바링허우 대표 자산가 중 하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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