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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희루로 향하는 패방. |
(아주경제 홍우리 기자) 조조와 화타 등 역사상 많은 명인을 배출한 보저우는 그 자체로 살아있는 역사 박물관이었다. 시내 중심을 가로질러 흐르는 궈허(渦河)에서부터 조조의 아버지 등 일가족의 무덤, 길이름을 비롯한 거리 곳곳에서 고도(古都)의 풍모가 느껴졌다.
화조암을 나와 들린 화희루(花戱樓) 또한 보저우시에서 내로라 하는 주요 명소 중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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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희루 입구의 전경. |
후한 말기의 명의 화타가 나온 뒤 보저우는 주요 약재 생산지이자 약재 거래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후 청(淸) 순치 13년(1656년)에 이르러 약재 판매상인 산시(山西)성의 왕비(王璧)와 산시(陝西)성 거상 주쿵링(朱孔領)이 사업 번창을 기원하고 자신들의 성공에 대한 보답의 의미로 연극 무대를 지었는데 이 것이 바로 화희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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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기와와 석각으로 화려함을 더한 화희루의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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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등 공연이 이루어지던 무대의 천장과 난간 등에서 수준 높은 목각 기술을 엿볼 수 있다. |
청색 기와를 얹고 다양한 문양의 조각을 새겨넣은 고희루(古戱樓)는 그야말로 화려함의 극치였다. 아치형의 문에서부터 벽면과 천정, 기둥을 가득 채운 조각이 어찌나 정교하고 생동감이 넘치는지, 과연 사람의 손에서 탄생한 것이 맞나 하는 의문이 들 정도였다. 화희루의 중심 건물이자 공연 무대인 고희루는 천장과 난간 등 곳곳이 목각(木刻)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오랜 세월이 다소 색이 바라긴 했지만 당시의 수준 높은 목각 기술을 엿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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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물함 뒤 보호용 유리상자 안에 서있는 관우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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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희루 정면에 놓인 정전은 관우 제사를 지내던 사당이었다. |
섬세한 조각 예술의 아름다움에 입을 다물지 못하면서 시선을 돌리자 이번에는 고희루 정면 앞에 놓인 재물함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뒤 보호용 유리 상자 안에 놓여있던 익숙한 것은 다름아닌 관우의 상이었다. 치켜올린 눈썹과 덥수룩한 수염, 기세등등한 표정과 갑갑한 유리 상자는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이 곳 정전(正殿)에서는 관우를 모시고 있기에 화희루는 '대관제묘'라고 불리기도 한다. 대전 안에는 관우와 관우를 가장 가까이서 보필한 관평, 주창의 목조상이 있었으나 일본침략 시기에 화제로 소실됐다고 했다.
관우는 죽은 후에도 후대 사람들과 역대 왕들에 의해 추앙을 받았다. 곳곳에 관우를 위한 사당이 들어섰으며 마침내 민간에 의해 재물신으로까지 받들어졌다. 관우는 심지어 조조의 고향에서 까지 조조 이상의 위인으로 여겨졌다.
"화희루는 청대에 조성되었습니다. 당시 삼국지연의가 크게 유행하면서 사람들의 마음 속에도 조조는 군주를 배신한 간웅(奸雄)으로 비춰졌죠. 그래서 조조가 아닌 관우를 모시게 된 것입니다." 안내원이 귀띔해줬다.
조조에게 있어 나라의 번영을 위해 적국의 장수를 제거하는 것은 당연지사. 하지만 조조는 관우를 제거한 뒤 극심한 불안감에 시달려야했다. 심지어 고향에 관우 혼령까지 모셔놓았으니 지하에 묻힌 조조가 이 사실을 알면 눈쌀을 찌푸리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조조의 고향인 보저우에서 조조는 언제쯤 만나게 될까. 커져가는 궁금증을 안고 취재팀은 발걸음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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