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희스타힐스

<걸어서 삼국지기행 23 안후이성편> 7-1 첸산의 이교, 두 영웅을 매혹시키다.

기자정보, 기사등록일
입력 2012-03-12 18:02
    도구모음
  • 글자크기 설정
(아주경제 강경록 기자) 어릴적 꼭 읽어야만 하는 중국 3대 소설이 있었다. 삼국지와 영웅문, 서유기다. 영웅들의 일대기를 그린 이 소설들은 역사적 사실과 상상력을 절묘하게 조합해 엮은 최고의 소설들이다. 이들의 이야기는 현재까지 많은 영향을 주고 있고 우리 문화 깊숙히 들어와 있다.

특히 영웅들의 일대기를 그린 소설 들 중 중 빠지지 않는 이야기거리가 있다. 바로 여인들의 이야기다. 역사는 남자들이 쓰지만 그 남자는 여자들이 만든다고 하지 않았던가! 과거 역사는 남성 중심적으로 쓰여졌지만 비사는 여성들에 의해 쓰여졌다고도 할 수 있다.

삼국시대에도 영웅들을 매료시킨 여인들이 여럿 있었다. 강남이교(江南二喬) 또는 강동이교라 불리는 대교(大喬)와 소교(小喬)자매도 그 중 하나다. 이들은 오나라의 영웅 손책과 주유의 아내이기도 하다. 본지 '걸어서 삼국지 기행' 취재진은 삼국시대 최고의 미녀라고 불렸던 이들 이교를 만나러 길을 떠났다.

취재진은 루장(廬江)현을 떠나 안후이성(安徽省) 안칭(安慶)시에 있는 첸산현(潜山县)으로 이동했다. 안후이성 관내의 삼국지 유적지를 찾아가는 기행에서 가장 기대가 되는 곳도 이교의 고향 첸산이었다.

미색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강동의 이교는 자연히 문학예술의 대상이 되었다. 가장 일찍부터 널리 회자되고 있는 작품은 당대(唐代)의 시인 두목(杜牧)이 지은 ‘적벽(赤壁)’이라는 시다.

折戟沈沙鐵未鎖(부러진 창 모래에 묻혔으니 쇠 아직 식지 않아,)
自將磨洗認前朝(스스로 갈고 씻어보니 삼국의 유물임을 알겠네.)
東風不與周郞便(동풍이 불어와 주랑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면,)
銅雀春深鎖二喬(동작대에 봄 깊어갈 때 강동이교는 갇혔으리라.)

고금을 막론하고 정복자는 피정복자의 처와 누이,그리고 딸들을 차지했다. 조조는 원소를 멸망시킨 뒤 원소의 며느리 진씨를 자신의 며느리로 삼았고 손권도 원술의 딸을 취한 적이 있었다. 두목은 시로써 당시 소교의 미모를 극찬했다. 그는 조조를 폄하한 것은 아니지만 소설 삼국지연의의 내용을 일부 인용했다. 하지만‘적벽대전’에서 조조가 승리했다면 강동이교 또한 조조가 차지했을지 또 누가 아랴!

취재진을 안내하던 여유국 직원은 이교에 대해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고 했다. 사서에 몇 줄 정도 언급 되어 있을 뿐이라고 했다. 그가 들려준 이야기는 이미 루장현 주유묘에서도 들었던 내용이었다.

"손책과 주유가 대교와 소교를 만난게 된 계기는 바로 전쟁입니다. 진수(陳壽)의 ‘삼국지’ 가운데 ‘오(吳)서 주유전’에는 '환현을 공격해 함락했다. 이 때 교공(喬公)의 두 딸을 얻었는데, 모두가 경국지색이었다. 손책 자신은 대교를 아내로 맞이했고, 주유는 소교를 아내로 맞이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배송지(裵松之)가 주를 달때 이용한 ‘강표전’에도 '손책이 주유에게 태연하게 장난을 걸며 말했다. 교공의 두 딸이 비록 훤하게 잘났다지만, 우리 둘을 얻어 남편으로 삼았으니 그들도 아주 신이 날 것이오’”라는 언급이 있습니다".

구체적인 자료는 남아있는 것이 없다고 했지만 위 두가지 기록을 통해 우리는 몇 가지 사실들을 추론해 볼 수 있었다. 첫째는 손책과 주유가 이교를 얻은 시기가 건안(建安) 4년(199) 환현을 공격한 뒤의 일이라는 것과 손책과 주유가 25세였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교의 나이가 20세 전후 였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또 이교의 성은 본래 ‘교(喬)씨인데 이들의 이름에 관해서는 사서에서 찾을 수 없어 언니를 대교, 동생을 소교로 구별해 놓았다는 것이다.

이교가 사용했을 것이라 추정되는 우물이 논 가운데 외롭게 서있다.

안후이성 안칭시 첸산현 시내 부근에 이교의 집터(교가장원)와 우물이 남아있다.

전문가들은 첸산현에서 발견된 우물에 ’한 (漢) 순제(順帝) 건강(健康)년‘(144년) 6글자가 새겨져 있어 이교들이 사용했을 것이라 추정하고 있다.


취재진은 이교가 살던 곳이라 추정되는 교가장원(喬家莊園)으로 이동했다. 도착한 곳은 생각지도 못한 곳이었다. 논 위에 작은 우물하나가 있었는데 바로 이곳이 이교의 집터라고 여유국 직원이 소개했다.

“삼국시대에는 이 곳으로 강이 흘렀습니다. 하지만 논으로 조성되면서 지금의 모습으로 변했습니다. 강 부근에 대교와 소교의 집이 있었는데 이교가 손책과 주유에게 시집간 이후 온 가족이 살던 곳을 떠나면서 교가장원은 모습을 감추었습니다. 이후 집 터에 절이 들어섰는데 당나라 이전에는 쌍계사(雙溪寺)가 지어졌으며 이후 명 청나라때 광교사(廣敎寺)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집터라고 찾아왔지만 오히려 궁금증이 더해졌다. 주유의 묘가 있던 루장현에도 비슷한 우물이 있지 않았던가. 취재진은 이곳이 이교의 집터인 근거가 무엇이 있냐며 재차 확인했다.

“지금 보고 있는 우물은 대교와 소교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는 연지정(胭脂井)이라는 곳입니다. 여기서 그 시절 사용했을 것이라고 추정되는 청동 거울들이 많이 발견되었습니다. 청동은 그 시절 고가의 물건입니다. 당시 귀족출신인 이교 또한 사용했을 것이라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또 우물 테두리에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삼국시대 전부터 이 자리에 있었다는 기록입니다. '한 (漢) 순제(順帝) 건강(健康)년(144년)' 6글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이 글자를 근거로 우물이 먼저 있었고 그 뒤에 이교의 집이 지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뿐 아니라 청 광서년에 이곳은 이미 첸산(潛山)으로 불렸습니다. 당시 관리였던 천선룽(陳愼容)은 이 곳이 삼국시대 미녀 대교 소교의 고향이라는 소리륻 듣게 되고 연지정을 확인한 그는 광교사로 찾아가 이 곳 승려와 절 내부를 둘러보던 중 연지정과 함께 흙 무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 무덤이 이교의 아버지 무덤이라는 것을 확인했다고 합니다. 발견 당시 이 우물은 물은 마르고 이끼가 껴 있었고 우물 보호를 위해 정자를 지었으나 후대에 사라졌다고 합니다”

여유국 직원은 차근차근 이곳이 이교의 고향이라는 근거를 설명해 나갔다.

“지난 1995년 현지 문물관리국 관계자가 인근 민가의 집에서 이 우물 주위를 보호하고 있던 테두리를 발견해 원래 위치해있던 곳으로 이전했습니다. 당시 이 우물을 소장했던 민간인은 문화 대혁명 당시 소실 될까 두려워 자신이 직접 숨겨왔다고 말했습니다. 지금은 돌 테두리에 새겨진 글이 희미해 육안으로 확인하기 힘들지만 문화대혁명이 끝난 후 문화 유적 보호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어 이 곳 첸산현 민가에서 전해지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곳 여자들은 연지정 물로 씻으면 예뻐해진다고 믿어 이 곳에 와서 자주 씻었다는데 그래서인지 챈산현에는 미인이 많습니다. 현재 이 지역 출신 여성들이 미인이 많다는 주제로 TV프로그램을 제작할 예정입니다”

이곳 여유국 직원은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작은 우물하나에 이렇게나 많은 이야기가 담겨있다는 사실 또한 놀라웠다. 하지만 그 설명은 단지 추론일뿐 부족한 면이 있었다. 더욱 확실한 근거가 없는지 다시 물었다. 그러자 여유국 직원은 우리를 다른 곳으로 안내했다.

첸산현 역사박물관의 모습

첸산역사박물관에는 첸산의 역사적 유물과 관광지들을 소개해 놓았다.

이교의 우물 터에서 발견되었다는 천설룽이 세운 비석이 첸산 역사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도착한 곳은 첸산현 유물박물관이었다. 이곳 박물관에는 수많은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수천년전 사용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청동거울부터 도자기, 칼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여유국 직원이 갑자기 바빠졌다. 휴대전화로 누군가와 계속 통화를 했다. 분위기는 좋지 않았다. 뭐라고 계속 설명하는데 상대방쪽에서 계속 거부를 하는 모양새였다. 이유는 조금 후 전화를 끊은 이후에 알게 되었다.

“교가장원에서 설명드린 우물에 천선룽이 비석을 세웠습니다. 그 비석이 바로 이곳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아직 검증 절차가 끝나지 않아 원래 공개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만 오늘 특별히 여러분들을 위해 공개할 예정입니다. 단, 입장가능한 인원은 두명입니다. 그리고 촬영도 안됩니다”

예상치 못한 횡재였다. 취재는 역시 의문의 연속에서 얻어지는 결과물이었다. 우물 하나에 이렇게 많은 이야기가 담겨져 있고 또 그것을 검증하기 위해 수많은 근거들을 제시하고 있었다. 박물관 소장이 도착할 때까지 박물관 내부를 구경하기로 했다. 박물관 안은 말 그대로 첸산의 역사였다. 수많은 유적이 전시되어 있었다. 삼국시대에도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음을 알 수 있었다. 때문에 손책과 주유도 이러한 이유로 이곳을 점령했을 것이라는 것을 어림짐작해 볼 수 있었다.

1시간여가 흘러 담당 박물관 소장이 찾아왔다. 재차 주의를 부탁했다. 단 두명만 들어갈 수있고 아무것도 못들고 들어간다고 했다.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그냥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 비석을 보기 위해 멀리 타국에서 왔다고 부탁했다. 또 우리의 목적은 관광이 아닌 삼국지 유적의 취재임을 강조했다. 왜 이곳이 이교의 고향이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정확하게 알려야한다고 재차 설득했다. 그제서야 비로소 소장도 우리 모두를 들어오게 허락했다. 그리고 비석만 촬영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천선룽이 비석에 기록을 남긴 것은 문화적으로 매우 가치 있는 일입니다. 삼국시대는 혼란했던 시기였고 영웅과 미인의 사랑이야기는 매우 흥미롭고 사람들에게 오랫동안 회자되며 사랑받는 소재입니다. 후대에 이를 기억하기 위해 이교가 살던 터에 대한 고찰 내용들을 여기 비석에 기록해 두었습니다. 첸산은 예로부터 살기 좋은 자연조건을 갖추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 곳 사람들은 외모 뿐 아니라 내면까지 아름다웠다는 것을 비석 첫 출에 밝혀두었습니다. 천선룽은 '나는 첸양(삼국시대 첸산의 이름)의 관리로 이 곳 사람들을 다스리기가 편하다'라는 의미의 글이 있습니다. 산과 물이 좋고 공기도 좋아 민풍(民風)이 아름답다고 적혀있습니다”

비석을 확인한 우리는 밖으로 나와 나머지 이야기를 들었다. 손책과 주유, 그리고 이교에 대한 이야기에 대해 더 듣고 싶었다.

“주유와 손책이 당시 2만 대군을 이끌고 첸산으로 왔습니다. 어느날 밤 주유가 산책을 하는데 어딘선가 아름다운 악기 연주소리가 들렸습니다. 소리를 따라가 보니 교가장원이었습니다. 누군가가 악기를 연주하고 있었는데 그 연주자가 연주하다가 틀렸다고 합니다. 이에 주유는 곧 문을 두드리고 대교와 처음 대면했습니다. 이때 ”曲有誤,走郞顧“(연주 하다가 틀린 부분이 있어 복도를 지나가다 돌아본다는 말)라는 말이 생겼습니다. 이후 주유의 관심을 끌기 위해 여자들이 음악을 연주하다 일부러 틀리기도 했었다고 합니다. 이를 통해 주유는 훌륭한 장수 뿐 아니라 예술적 소양도 높은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대교와 소교도 문학적 소양이 높은 양갓집 규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첸산 역사박물관에는 청동기 거울 등 각 시대별 거울들이 보관되어 있다. 이 거울을 통해 첸산현에 미인들이 많았다는 것을 추론해 볼 수 있다.

첸산 역사박물관에는 청동기 거울 등 각 시대별 거울들이 보관되어 있다. 이 거울을 통해 첸산현에 미인들이 많았다는 것을 추론해 볼 수 있다.

첸산 역사박물관에 전시된 청동검을 통해 첸산이 오래전부터 역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직접 삼국지 현장을 찾아 보고 들으면서 책에서는 확인하기 힘든 수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특히 두 영웅과 경국지색의 미모를 갖춘 두 자매들의 이야기는 후대에 회자되었다. 이에 더욱 관심의 대상이 되고 또 많은 이야기가 덧붙여져 또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지금은 관광자원으로 각 고장 마다 관광 마케팅 차원에서 이런 이야기를 만들어 퍼뜨리고 있었다. 아름다운 러브스토리는 고금을 통틀어 가장 흥미로운 이야기거리이자, 자원이기 때문이다.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컴패션_PC
0개의 댓글
0 / 300

로그인 후 댓글작성이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닫기

댓글을 삭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이미 참여하셨습니다.

닫기

이미 신고 접수한 게시물입니다.

닫기
신고사유
0 / 100
닫기

신고접수가 완료되었습니다. 담당자가 확인후 신속히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닫기

차단해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사용자 차단 시 현재 사용자의 게시물을 보실 수 없습니다.

닫기
실시간 인기
기사 이미지 확대 보기
닫기